《여성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민중미술가 임옥상 씨(73)의 작품에 대해 서울시가 철거 작업에 나섰다. 임 씨의 작품이 세워진 다른 기관과 단체에서도 작품 존치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일부 단체는 임 씨의 범죄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훼손됐다고 보고 빠르게 철거 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작가나 주체가 협업해서 만든 공동 작품의 경우 관련자들의 의견을 듣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반발도 있다. 이번 사안은 작품과 예술가를 별개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오래된 논쟁과도 연결된다.
‘임옥상미술연구소’ 웹사이트에 따르면 임 씨가 제작한 작품은 전국 100여 개에 달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 “의미 변절시켜 철거해야” vs “성급히 지워선 안 돼”
서울시는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을 5일 철거했다. 당초 서울시는 이들 작품을 4일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기억의 터 설립추진위원회’(설립추진위)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시민단체가 이에 반대하는 집회에 나서며 작업이 한 차례 연기됐다.
서울시는 임 씨의 작품이 ‘기억의 터’에 있는 것은 위안부뿐 아니라 시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답했고, 설립추진위가 주장하듯 조형물에 표기된 작가 이름만 삭제하자는 의견은 23.8%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작가 이름만 가리는 것은 오히려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며 “공간의 의미를 변질시킨 임 씨의 조형물만 철거하고 대체 작품은 국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재설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립추진위와 정의연은 두 작품이 임 씨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설립추진위원과 여성 예술가들이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한 공동 창작물이며 시민 1만9755명이 모금에 참여해 철거 이전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세상의 배꼽’에는 임 씨의 이름은 없고 윤석남 작가의 드로잉이 있고,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증언록에서 발췌한 할머니들의 증언과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지의 눈’ 오른쪽 아래에는 ‘디자인 임옥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최영희 전 국회의원(민주당)은 “임 씨가 성추행 사건(2013년) 뒤인 2016년 작품 제작 의뢰를 받아들인 데 많이 분노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임 씨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시가 대체 작품 설치에 관해 설립추진위 의견을 듣겠다고 했지만 이를 공문으로 달라고 하니 거부하고 있다”며 “임옥상 지우기가 아니라 위안부 지우기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서울시는 ‘기억의 터’ 외에도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앞 ‘서울을 그리다’, 마포구 하늘공원의 ‘하늘을 담는 그릇’,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광화문의 역사’ 등 임 씨 작품 6개를 모두 철거하는 작업을 조만간 마무리할 계획이다.
● “작품 계속 두면 2차 가해”
전태일재단은 임 씨가 제작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반신상과 관련해 4일 ‘전태일동상 존치·교체 숙의위원회’를 열었다. 노동계와 문화·여성·청년 등 각계 인사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총 세 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동상 존치·교체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임 씨가 2005년 만든 전태일 열사 반신상은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 위에 설치돼 있다. 조각상이 세워진 곳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자리다. 2017년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가이 라이더가 이 동상을 찾아 헌화했다. 제작비는 노동자와 시민 모금으로 마련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동상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게 내부 중론”이라고 밝혔다. 한 사무총장은 “동상을 계속 둘 경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가 있고, 동상에 관한 논란이 계속돼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며 “더 좋은 동상을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 씨의 철거를 검토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광주광역시다. 광주시 도시철도공사는 2003년 1호선 농성역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솟아오르는 산’의 철거를 검토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도 논의를 시작했다. 김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이 2011년 봉하마을에 세운 ‘대지의 아들 노무현’이 있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논의 중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된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지자체들은 신중한 분위기다. 임 씨의 작품 4점을 보유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작품 4점 모두 제정구 선생을 기리는 작품이라 철거 후 대안도 마련해야 해 바로 결정할 수 없다”며 “충분히 논의한 뒤 철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누가 이들에게, 대지의 어머니’를 보유한 경기 광주 나눔의집은 “당장 철거 계획이 없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철거 여부는 아직 검토 전이다”라고 밝혔다.
● 철거 vs 존치하고 문제점 기록… “국민 논의 필요”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 수년간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를 뒤흔들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된 바 있다.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프랑스 화가 발튀스(1908∼2001)의 작품을 철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0대 소녀를 신비롭고 섹슈얼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이 아동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온라인 철거 청원에 8500명이 서명을 하면서 논란이 됐다. 당시 미술관은 “시각예술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작품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결정은 예술가와 작품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재의 잣대로 미술사 속 예술가를 평가할 경우 수많은 작품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파블로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카라바조 등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성적 일탈, 인종 차별 등에서 현재의 잣대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 행적을 병기해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방법도 나왔다. 2019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고갱의 초상’전을 열며 고갱이 “타히티에서 10대 소녀들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는 명백히 백인 남성의 지위를 악용했다”는 설명을 함께 걸었다. 당시 테이트모던 관장이었던 비센테 토돌리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므로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생존 작가의 경우 선택이 나뉘는 경우도 있다. 미국 화가 척 클로스(1940∼2021)가 살아 있던 2018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했을 때,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예정된 그의 개인전을 무기한 연기하고 시애틀대는 작품을 철거했다. 그러나 미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그가 그린 빌 클린턴 초상화를 계속 전시했다. 작품 철거가 자칫하면 검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단죄는 사법 기관의 역할이고, 미술관은 인간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대화를 이끌어내는 장이어야 한다는 취지다.
철거할 것인가, 남기고 기록할 것인가. 선택은 각 기관과 국민의 몫이다. 임 씨의 경우 이런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조형물이 100개가 넘는다는 게 문제다. 미술사가 황정수 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임 씨가 어떻게 그 많은 조형물과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작가가 명예를 걸고 작품을 제작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품행을 지닐 의무가 있다”며 “작품을 철거하고 다시 제작한다면 그에 따른 비용까지도 작가에게 청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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