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경 한 의료분야 벤처기업을 취재한 적이 있다. 생명윤리와 관련이 있다 보니 기술 적용 대상을 확대할 때 정부 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는 분야였다. 당시 기업 관계자는 “어떤 기업이 뭘로 돈을 벌지 사실상 위원회가 정해주는 셈인데 위원 중에 기업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두 의료계나 법조계 인물뿐”이라고 토로했다. 최근 이 정부 위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5년 전과 위원 구성에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달 제4차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여는 등 대대적인 ‘킬러 규제’ 혁파에 나서고 있다. 산업단지 업종 규제나 외국인 고용 규제 등 복잡하고 시대에 맞지 않았던 많은 규제가 혁파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동아일보 ‘킬러 규제에 무너지는 중기 생태계’ 시리즈를 통해 취재한 기업들 상당수는 여전히 ‘규제개혁의 효과를 아직까지 체감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시리즈 취재 과정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취재 대상이 됐던 기업이 기업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익명을 보장하고 지역 정보 등을 최대한 가리겠다고 해도 취재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속내를 들어보면 ‘앞으로도 계속 관련 기관과 얘기할 것이 많은데 괜히 껄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두 번째는 규제 기관과 기업 간에 말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기관에서는 ‘(기업이) 규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하고, 기업에서는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규제 기관에서는 기업에 제대로 설명했고 이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기업은 관련 공문만 한 장 받았을 뿐 별도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권력의 불균형에서 오는 ‘불통’이 여전히 현장에서는 걷어내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인력도, 네트워크도 부족한 중소기업이나 벤처·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인허가권 같은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는 기관이 ‘안 된다’고 했을 때 ‘왜 안 되냐’고 꼬치꼬치 물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걱정되고, 기업 경영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시간도 없다. 반면 관에서는 나름대로 설명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규제가 만들어지거나 조정되는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인 기업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관행 아닌 관행’은 규제개혁의 1순위 과제로 꼽혀 왔다. 입법 부처가 규제영향평가서를 쓰고,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이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이조차 거치지 않으려고 국회에 바로 ‘우회 입법’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한국에 규제개혁위원회가 처음 생긴 것이 1998년이니 벌써 25년째 규제개혁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규제개혁은 역대 정부의 1순위 과제이자,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과제로 남아 있다. 회의를 열고 대통령이 센 발언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뭘 원하는지 직접 현장을 찾아가 듣고 소통할 때 규제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정부가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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