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김부겸 대안론’ 잠재운 李, 공천 옥새 쥐고 총선까지 가려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8일 01시 18분


‘방탄 단식’ 비판에도 기사회생 전략 일단 먹히는 듯
박지현의 눈물, 당내 기류 변화 보인 상징적 장면
단식이 ‘신의 한 수’인지 ‘신의 꼼수’인지는 본인 몫
“가결 당론” 선언하면 명분은 얻을 수 있을 텐데…

정용관 논설실장
정용관 논설실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 돌입을 앞두고 한때 ‘양평거사’ 김부겸 대안론이 심심찮게 회자됐다. 호사가들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 대표 측으로선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기류였다. 김 전 국무총리는 정치활동을 자제해 왔지만 호남에선 광주 출마론이 제기된 적도 있다. 물론 지역 언론 인터뷰에서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잘랐는데 활동 재개에 대한 여지까지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자칫 호랑이를 키울 수도 있는 김부겸 대안론, 이번 단식으로 일단 잦아들었다.

첫 일주일, 느닷없는 단식 카드에 비명 측은 허를 찔린 듯 당황했다. 2주 차 때부터는 당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고 한다. 비명 핵심 몇몇을 제외하곤 상당수 의원과 총선 공천을 노리는 예비 후보들의 ‘알현(?)’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회복식을 만들어주겠다”며 눈물을 흘린 모습은 19일째로 접어든 단식 과정을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대선 때 ‘이대남’에 맞설 ‘이대녀’의 선봉장으로 영입됐다가 반명으로 돌아서고 개딸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27세의 젊은 정치인이 단식 12일 차 되던 날 이 대표를 찾을 때의 번민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 대표가 내년 총선 공천장의 옥새를 쥐는 건가, 하는 판단 말이다.

이 대표가 당내 반대파를 제압했다고 단정하긴 이르나 ‘방탄 단식’ 비판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기사회생의 발판은 마련한 것 같다. 언제 어떻게 무슨 명분으로 끝낼 것이냐는 출구 전략이 뭔 의미가 있겠나. 19일 서울에 올라올 수 있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단식장을 찾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친문으로선 이 대표 단식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걸로 비칠까 우려하지 않을까. 윤석열 대 이재명의 싸움으로 끌고 가야 하는 이 대표도 최근 부쩍 정치 현안에 직접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훈수 정치’에 기대려 할까.

이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명분 없는 부결’의 딜레마에 빠진 민주당 의원들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20일 가까이 굶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가결을 주장하기도 어렵게 됐다. 부결 당론을 하네, 체포동의안 보이콧을 하네 하는 등의 말들이 오가는 이유다.

보이콧이든, 부결 당론이든 이 대표가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장면은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럴 거면 단식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아마 이 대표 측은 일단 구속 리스크를 면하고 당을 급속히 총선 체제로 재편하는 로드맵을 구상 중이지 않을까. 10월 중순이면 총선 D-6개월이니 당 대표가 맡는 인재영입위를 띄우고, 총선기획단을 꾸리고, 현역 의원 평가 작업도 시작하고…. 그러다 공천 살생부 논란이 터지고 탈당 분당 등의 내홍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재명의 민주당 체제로 총선을 치른다면 쇄신과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 국민의힘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의힘 사정도 도긴개긴이니 현재로선 그런 분석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대표가 지금 떼밀려 물러나진 않으나 내년 총선 한두 달을 앞두고 좀 더 주도적인 위치에서 비대위 전환의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 역시 시나리오일 뿐이다.

이 대표는 일단 자신이 살기 위한 생명 연장의 수(手)를 뒀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 직선제 요구, 지방자치제 도입 등 큰 명분을 내세우고 단식을 감행했던 YS, DJ의 단식과는 달리 이 대표의 단식은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한 게 사실이다. 단식의 목적, 즉 국가적 의제 없이 셀프 구명의 사적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단식으로 죽은 정치인은 없다고 한다. 단식을 직접 해 본 적도 없고, 그 힘듦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사골 국물’식의 조롱엔 동의하진 않는다. 다만 “무엇을 위한 단식이었느냐”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요 8개국(G8) 진입 운운하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단식이란 후진적 행태를 봐야 하는 정국 상황이 답답하다. 정치는 비정하고 갈수록 더 막장이다. 이 대목에서 ‘단식 그 후’를 상상해본다. 만일 이 대표가 단식 종료와 함께 체포동의안을 당론으로 가결시켜 달라고 공개 호소한다면? 그토록 “증거가 하나도 없다”며 검찰 조작이라고 반발했으니 당당히 영장실질심사를 받는다면? 영장 발부 여부를 섣불리 예단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제3의 명분을 찾을 수 있진 않을까. 이번 단식이 ‘신의 한 수’가 될지 ‘신의 꼼수’가 될지, 그 선택은 오로지 이 대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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