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모하비 사막의 황량한 도로를 달리는 데이빗. 오늘 안으로 꼭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 먼 길이라 시간이 빠듯하다. 그의 앞에 세차라고는 한 번도 안 한 듯한 대형 컨테이너 트럭이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느긋이 간다. 매연 때문에 눈을 못 뜨겠다. 텅 빈 도로라서 트럭을 추월한다. 이게 화근이었다. 굼벵이였던 트럭이 위협적으로 달려와 데이빗을 앞지른다. 그러더니 또 느릿느릿 간다. 추월 차선에서는 반대 차선까지 차지하고 갈지자로 간다. 그러다 선심 쓰듯 데이빗에게 먼저 가라고 길을 내준다. 그를 믿고 추월하던 데이빗은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할 뻔한다. 그제야 그는 트럭 기사의 살의를 깨닫는다.
트럭 기사는 왜 데이빗에게 살의를 품었을까? 단 한 번의 추월에 왜 그토록 분노할까? 장난 삼아 사람을 죽이는 악당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데이빗을 쫓는 중에도, 시동이 꺼져 멈춰 선 스쿨버스를 도와주기도 한다. 폐차장에 어울릴 고물 트럭에 비해 데이빗의 차는 빨간색의 날렵한 승용차다. 타이까지 맨 말쑥한 그에게 열등감을 느낀 걸까? 추월당한 게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피해의식을 부추긴 걸까?
사소한 손해나 양보도 못 견디는 이들이 늘어난다. 단골 식당에서 청년이 TV 모서리에 이마를 긁혔다. TV와 머리가 스치는 건 일어나기 힘든 각도이지만 주인은 그날 장사를 접고 청년을 병원에 데려갔다. 이런 걸로 병원까지 왔느냐고 의사가 놀릴 정도로 가벼운 상처였다. 주인은 다음 날의 진료비까지 미리 지불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주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며칠 전, 80대 노모가 아파트 단지 안의 운동기구를 쓰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다. 치료비가 제법 나왔다. 조심에 조심을 해도 모자랄 고령이기에, 아파하는 엄마에게 잔소리만 늘어놨는데 젊은 친구들은 손해배상 청구를 왜 안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따져보면 앞 순서에 기구를 썼던 사람의 잘못도 있는 듯했고, 무엇보다 치료비 부담이 커서 엄마를 살살 떠봤지만 단호했다. 설령 잘못이 반반씩이라도 절대 책임을 물을 마음이 없단다.
0.1점의 차이로 대학에 떨어져 십수 년의 공부가 물거품이 되기도, 성적이 좋아도 나보다 잘난 부모를 둔 이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빼앗기기도 하는 젊은이들이 피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권리를 따지며 세상을 적대시하는 세태를 나무랄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손해를 볼 수도,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그게 바로 어울려 사는 맛이라고 가르치기엔 기성세대로서 명분이 부족하다. 초대형 흥행작을 다수 만든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이다. 잘 만든 영화엔 거대한 예산이나 일류 스타가 필수조건이 아니란 걸 당당하게 보여주는 영화.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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