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북핵 6자회담이 열리던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각국 대표들이 잇단 양자 협의와 정보 수집에 분주한 와중에도 러시아 대표단만은 구경꾼처럼 유유자적했다. 러시아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러시아 측도 애써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러시아 대표 중엔 아예 넓은 휴게실에 자리 잡고 앉아 종일 TV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회담이 교착에 빠질 때면 쓱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킬 아이디어를 제시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런 러시아를 당시 미국 측 차석대표는 ‘단역배우’에 비유했다.(빅터 차 ‘불가사의한 국가’)
냉전 종식 이래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선 불쑥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그러던 러시아가 지축을 흔들 만큼 요란하게 한반도 무대로 깊숙이 들어왔다. 러시아 극동에서 이뤄진 김정은과 푸틴 두 독재자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 결과로 나올 ‘위험한 거래’에 국제사회는 벌써 긴장하고 있다.
사실 이번 만남은 푸틴이 오랫동안 준비한 기획 이벤트일 가능성이 높다. 3년 넘게 ‘코로나 자폐(自閉)’에 들어갔던 김정은 정권이 국경을 다시 열기 무섭게 국방장관을 북한 열병식에 보냈고 이어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까지 끌어냈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재고가 바닥나 가는 포탄과 로켓이 절실한 형편에서 북한을 향해 식량과 에너지, 거기에 첨단 군사기술까지 제공할 수 있다고 유혹한 결과일 것이다.
1990년 한-소 수교 이래 북-러 관계는 10년간 사실상 단절됐다. 러시아는 시종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북한은 본격 핵 개발에 나섰다. 그 냉각기를 끝낸 것이 푸틴의 2000년 평양 방문이었다. 러시아 지도자로선 첫 북한 방문이었고, 김정일은 이듬해 장장 24일에 걸친 러시아 방문으로 화답했다. 푸틴의 환대에 김정일은 “흔히 동반자(partner)란 말을 쓰는데, 우리에겐 그런 용어가 필요 없다. 친구를 동반자라고 하지 않는다”며 신뢰를 나타냈다.
푸틴은 과거에도 남-북-러를 잇는 철도·가스관 연결 프로젝트나 미국·러시아가 북한 위성을 대신 쏴주는 제안 같은 그럴듯한 아이디어로 주변국을 혹하게 만드는 재주를 보였다. 이번엔 김정은을 만나 위성 개발을 비롯한 전방위 군사협력을 약속하고 각종 전략무기까지 두루 보여줬다. 유엔 제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뭐든 내줄 수 있다는 듯.
그러면서 푸틴은 “우리는 무엇도 위반하지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다.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이를 준수하면서 협의가 가능한 것들이 있다”고 앞뒤가 다른 얘기를 했다. 역풍을 부를 노골적 제재 위반은 피하면서 우회 방안을 찾겠다는 뜻일 텐데, 실컷 눈요기 쇼핑을 즐긴 김정은으로선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국가적 총력전이 아닌 변방의 제한전으로 묶어두려는 푸틴으로선 북한 무기 조달도 최대한 은밀한 방식을 찾으려 할 것이다.
김정은과 푸틴은 어떻게든 지금의 국제질서를 흔들려 한다. 적어도 내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복귀한다면 세계정치의 판이 바뀔 것으로 본다. 이미 트럼프는 자신이 재선됐더라면 북핵 문제는 합의됐을 것이고, 당선되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24시간 내 끝내겠다고 장담한 터. 두 평화 교란자로선 기대를 걸 만하다.
앞으로 미국 대선까지 400여 일, 두 난봉꾼의 칼춤은 더욱 현란하고 교묘해질 것이다. 국제사회가 뾰족한 대책을 찾긴 쉽지 않다. 하지만 북-러가 아무리 은밀히 거래해도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발뺌 못 할 결정적 증거(스모킹건)를 찾아내 검은 거래를 틀어막는 수밖에 없다. 미국 대선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국제공조를 단단히 다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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