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물(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노래 ‘임진강’의 일부)
곤돌라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나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두 가지 평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하나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의 철조망 곁을 약 1.8km 걷는 ‘DMZ 다큐로드’였고, 다른 하나는 영화제가 캠프 그리브스에 마련한 ‘익스팬디드 비(非)극장 프로그램’의 투어였다. 이 둘에 참가하며 한 번은 비오는 날에, 다른 한 번은 맑은 날에 임진강을 곤돌라를 타고 건넜다.
어릴 때는 일본어로, 성인이 되어서는 한국어로, 나는 강을 건너며 수없이 들었던 이 ‘임진강’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 1960년대 말 일본인 포크 가수가 일본어로 부르기 시작하며 일본인에게도 유행하게 됐다. 그리고 2005년 영화 ‘박치기’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더 널리 알려졌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 노래의 음률(音律)과 가사가 마음에 다가와 좋아하게 된 것 같고, 노래 속의 강을 내려다보면서 실제로 건너니 감회가 남달랐다.
캠프 그리브스는 DMZ 남방한계선에서 2km 떨어진, 민간인출입통제선 내에 위치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군기지 중 한 곳으로, 1953년부터 미 육군 2사단 506연대가 2004년 8월 철수할 때까지 50년간 주둔했던 곳이다. 2007년 한국에 반환된 이후 경기도가 2013년 역사 문화 체험시설로 개방했는데, 미군이 사용했던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보존, 활용하고 있다.
캠프 그리브스 내 시설에서 열린 전시 프로그램 ‘귀신을 본 적 있나요?’는 6개 영상작품을 부대 안에 남아있는 몇 개 건물 안에서 나눠 상영했다. 낡은 2층 건물, 돔형 퀀셋막사들을 지나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탄약고에 이르러서는 이곳이 가진 비극적 역사성을 체감하게 됐다. 하얀 벽은 썩어 얼룩이 지고, 금속으로 이뤄진 건물 입구에는 녹이 슨 자국 그대로였으며 주변에는 초목이 덮여 있었다. 가득 찼던 탄약들이 사라진 텅 빈 안은 싸늘했다.
그곳에서 탄약 대신 제인 진 카이젠 감독의 영상작품 ‘이 질서의 장례’(2023년)가 상영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음악가, 미술가, 시인들과 군사 반대 활동가, 환경운동가, 디아스포라, 퀴어와 트랜스젠더 등 여러 사람이 계급, 분열, 파괴로 세워진 세계를 끝내기 위한 상징적인 장례의식을 치르며 시공간의 안정으로부터 벗어나 지배적 질서를 타도하고 해체하려는 의식을 담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질서는 우리의 삶에 효율을 주는 좋은 개념이 아닌, 평온한 일상을 빼앗은 악한 이념을 말한다. 전쟁의 상징적인 장소와 악한 질서를 타도하고 해체하려는 장례식 행렬이 하나가 되어 역사의 아픔을 고뇌하면서도 극복하려는 민중의 용기와 힘이 느껴졌다.
갤러리 그리브스의 마지막 섹션에서 상영된 정여름 감독의 작품 ‘조용한 선박들’(2023년)이 눈에 띄었다. 자살에 실패한 화자가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베트남전 참전 출신의 가이드와 함께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기억과 역사, 장소의 교차를 풍경 이미지의 몽타주로 구성한 것이고 베트남전쟁과 쇠망의 흔적을 더듬는 여정을 따라가며 관객들의 역사와 기억, 우리에게 남겨진 베트남전쟁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준다.
그리고 상설 전시로 열리는 ‘젊은 날의 초상’전에는 6·25전쟁을 겪을 당시 젊은 시절의 종군기자, 미군 병사, 한국 학도병의 모습이 사진, 유품과 함께 소개돼 있다. 전쟁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서 가족을 빼앗고, 청춘을 빼앗고, 생명 자체를 빼앗았다. 새끼 고양이 미스햅(Miss Hap)과 프랭크 프레이터 상사의 에피소드에선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휴전선 코앞에서 나는 평화의 귀(貴)함을 간절히 기원할 수밖에 없었고, 비록 보잘것없지만 작은 목소리라도 내보려는 용기가 생겨났다.
부대 안을 걸어가면서 오랜만에 풀숲의 뱀도, 도토리를 노리는 청설모도 보았고, 나무에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토리의 습격도 당할 만큼 자연이 살아있는 평온한 곳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서 임진강 전망대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임진강의 한쪽에는 철교, 그리고 끊어진 다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임진강은 말없이 그저 온화하게 그저 맑게 흘러가고 있었다.
눈길을 좀 더 멀리하니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보이던 북한산이 멀리 남쪽으로 보여 반가웠다. 이렇게 문화 공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DMZ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으로 벽이 없는 평화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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