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 열리는 유엔 총회는 ‘외교가(街) 슈퍼볼’로 불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외교무대다. 193개 회원국 모두 참석하는 만큼 다양한 양자·다자회담이 열린다. 국익을 관철하기 위한 각국의 외교 전쟁 또한 뜨겁다. 특히 현직 미국 대통령, 미 국무장관 등을 만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하지만 올해 유엔 총회에 참석한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의 방미 일정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및 측근과의 만남이 아닌 야당 공화당 주요 인사와의 회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베어보크 장관은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에 들르기 전 공화당 텃밭 텍사스주를 찾아 그레그 애벗 주지사를 만났다. 수도 워싱턴에 와서도 상원의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 제임스 리시 상원 외교위원회 공화당 간사를 만났다. 하원에서는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군으로 꼽히는 낸시 메이스 의원 등과도 회동했다.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독일의 현직 외교장관이 미 야당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베어보크 장관이 바이든 행정부의 오해를 살 위험을 무릅쓰고 공화당 의원들을 만난 것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지속돼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럽에선 과거 나토 탈퇴를 위협하며 방위비 분담 증액을 요구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되면 나토를 통한 서방 결속과 우크라이나 전쟁 공조가 크게 흔들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베어보크 장관은 독일 매체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우정은 한 정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순진하지 않으며 (미국이) 유럽을 미치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해도 유럽은 2016년보다 잘 준비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거듭된 형사 기소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주자 중 독보적인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2기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미국 우선주의’ 노선이 더 노골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중 무역전쟁의 확장판인 10%의 보편적 기초관세 부과와 함께 남부 국경 장벽 건설을 넘어 해외 주둔 미군 이동을 통한 미군 국경 배치를 공약으로 내놨다.
외교가에선 2016년 당선 직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군 장성 출신들을 외교안보 요직에 앉혀 정통 보수층에 안정감을 주려 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2기 때는 ‘트럼프 충성파’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요직을 독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주한미군 가족 소개령 등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충동적이고 위험한 지시에 제동을 걸었던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이른바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 같은 행정부 내 견제와 균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트럼프 2기의 충격은 그의 첫 집권 때만큼은 아닐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레 나온다. 예측할 수 있는 재앙은 대비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베어보크 장관의 행보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미국에선 예산 편성과 조약·인사 비준 등의 권한을 가진 의회가 대통령의 일방적인 행보에 제동을 걸 장치가 충분히 마련돼 있다. 아직 트럼프 2기 섀도 캐비닛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미 의회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중국과의 경제 관계 등 중차대한 문제에 놓여 있는 한국은 독일보다 느긋하게 미 대선 상황을 지켜볼 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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