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이 고장 났다. 이후 첫 출근길, 택시를 타면서 습관적으로 귀에 꽂았다가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다시 빼려다 순간, 손을 거두었다. 다년간의 탑승 경험에 기반한 찰나의 계산이었다.
30분 남짓한 이동 시간. 이어폰은 내가 당신의 소리를(배가 고프거나 아프다는 신호), 대화를(스피커폰으로 나누는 통화) 듣고 있지 않다는 배려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굳이 내게 한 번 더 말을 걸어주거나 할 필요 없다는, 보다 솔직하게는 가뜩이나 피곤한 출근길, 무의미한 대화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인상 좋은 기사님의 세태 한탄에 무심코 동조했다가 이동 시간 내내 쉬지 못했던 일련의 경험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어폰은 불필요한 정보와 대화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내는 도구이자 시공간을 차단하는 매개였다. 그리고 나는 집과 사무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어폰을 끼고 지내는 부류였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대화의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지내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새 이어폰의 구입을 고민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한 주 남짓한 시간 동안, 처음에는 어색하다 못해 지루했지만 점차 음악이 사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다. 한 번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곁에 여중생 몇이 섰다. ‘까르륵’ 웃음소리에 슬쩍 미소 짓다가 스스로의 나이 듦을 자각했다. 학창 시절, 앳된 얼굴에 어른들 몰래 컬러 립밤을 바르던 그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 ‘뭘 해도 예쁘다’. 이젠 그 ‘예쁨’이 이목구비가 아닌 존재 자체라는 것을 안다.
이어 버스를 탔는데 한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통화를 해 이목이 쏠렸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어폰 볼륨을 한껏 올렸을 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늙으면 다 그래! 암것도 아녀! 걱정하지 말어!” 자제분과의 통화인 듯했다. 귀가 조금 어두우신 건가? 대상에 대해 연민이 깃들 때 익명의 소음은 어떤 엄마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며칠, 자유로워진 건 ‘귀’인데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달라짐을 느꼈다. 가령 버스 창문 너머로 애틋하게 주고받는 손 인사, ‘조심히 가’ ‘사랑해’ 입 모양 같은 것들. 상점에 들러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한 번 더 웃고 한 번 더 말을 섞게 됐다. 종종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미소 띤 얼굴로 짧게나마 대화를 주고받고 문을 나서는 기분이 퍽 괜찮았다.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은 결국 스스로를 향하곤 했다.
마침내 이어폰을 되찾은 날, 어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했다. 줄곧 떠올렸던 곡을 출근길 배경음악으로 골랐다. ‘거리의 많은 사람들. 어딘가로 향하는 빠른 발걸음. 그렇게 모두 살아가지. 가슴속 깊은 사연들. 저마다 아픈 구석 하나쯤은 있네. 그렇게 모두 살아가지.’(제이레빗, ‘웃으며 넘길래’)
그리고 이제 나는, 이어폰 배터리가 나가도 당황하지 않는다. ‘까르륵’ 웃음소리를, 어떤 아들딸의 걱정과 어떤 연인의 사랑 고백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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