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한국전력 본사 지하에 비상상황실 ‘워룸(war room)’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고유가 여파로 창사 이래 처음 적자가 나면서 위기감이 높아진 때였다. 이 워룸에서 한전 컨소시엄 직원 80여 명이 야전침대를 두고 7개월 내내 휴일도 없이 살다시피 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따내기 위한 사령부 역할을 한 것이다. 전시처럼 일한 결실은 국내 1호 원전 수출이자 사상 최대 인프라 수출로 이어졌다.
며칠 전 한전 본사에 다시 워룸이 등장했다. 이번엔 사장 집무실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일 취임한 김동철 신임 사장이 간이침대를 들여놓고 이곳에서 숙박하고 있다고 한다. 김 사장은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휴일을 반납하고 24시간 본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직원들에게는 ‘제2의 창사’라는 각오로 경영 체질을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한전 설립 62년 만에 최초로 정치인 출신 최고경영자가 된 김 사장의 첫 행보다.
한전이 처한 위기 상황은 14년 전 워룸이 들어섰을 때와 비할 바가 못 된다. 2008년 3조 원에 육박하는 첫 적자에 충격을 받았지만, 올 상반기 영업적자는 8조4500억 원에 이른다. 2021년 2분기 이후 아홉 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내면서 누적 적자는 47조 원을 넘어섰다. 민간 기업이라면 벌써 파산하거나 매각됐을 수준이지만 한전은 천문학적 빚을 내며 버티고 있다. 2020년 말 132조 원이던 한전 부채는 2년 반 새 200조 원대로 급증했다. 앞으로 5년간 한전이 부담해야 할 이자만 24조 원, 하루 131억 원꼴이다.
우량 공기업이던 한전이 빚더미 ‘적자 공룡’으로 전락한 건 제때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은 게 결정적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정권 말이자 대선 직후인 작년 4월을 제외하고 전기요금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탈원전 정책에 매달려 발전 비용이 저렴한 원전 가동을 줄이고, 고가의 신재생에너지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려 비싼 전기를 생산했다. 전기료가 원가에도 못 미쳐 전기를 팔수록 손해인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출범 1년 4개월을 맞은 현 정부도 이젠 자유로울 수 없다. 당초 정부는 한전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올해 kWh당 51.6원의 전기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1, 2분기에 21.1원 올리는 데 그쳤다. 전기요금 정상화 숙제를 미루는 게 국정 지지율이나 내년 총선 때문이라면 지난 정부가 보여줬던 포퓰리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전기료 방치는 한전의 부실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망 투자가 위축되면 전력산업 생태계가 훼손되고 대규모 정전 같은 국가 재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적자 보전을 위해 한전이 찍어내는 한전채가 시중 자금을 빨아들여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문제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 돌파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한전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공기업 부실이 커지면 국민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원가와 수요를 기반으로 전기요금을 정상화하는 게 정공법이다.
한전의 2023년형 워룸은 정부와 정치권을 설득해 정치 논리에 좌우되는 기형적 전기요금을 바꾸는 사령부 역할을 해야 한다. 노조에 휘둘리지 않고 방만한 조직과 경영을 대수술하는 리더십도 보여야 한다. 앞서 5월 한전이 부동산 매각, 임금 인상분 반납 등 26조 원 규모의 재무구조 개선책을 내놨지만 진전이 없다. 국민이 공감할 만한 추가 자구안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다. 워룸이 정치인 출신 사장의 보여주기식 쇼에 그친다면 한전의 정상화는 물론이고 에너지 정책의 정상화도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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