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책방 정경[관계의 재발견/고수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5일 23시 30분


가을비 내리더니 바람이 순해졌다. 한결 산뜻해진 거리를 걷는데 손바닥처럼 등을 쓸어주는 바람이 설레서 사부작사부작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았다.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 시끌벅적한 시장을 가로질러서 한적한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여길 오고 싶었던 거구나. 익숙한 발걸음이 이끈 곳은 단골 책방이었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고수리 에세이스트
책방지기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잘 지냈어요? 지난번에 추천해 준 책 좋더라고요. 좋죠, 너무 좋죠! 책 좋아하는 마음 하나둘 꺼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망원동 골목에 동료 작가 두 사람이 연 책방. 벽에 손수 페인트칠할 때부터 들렀던 책방이었다. 페인트통에 쪼그려 앉아 이야길 나누던 자리에는 널따란 원목 책상과 의자들이 놓였다. 직접 짜서 들인 책장에 고르고 고른 책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양지바른 자리마다 하나둘 식물들이 늘어났다.

책방은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부지런히 글방과 전시와 문학 행사를 열었다. 사람들 들락거리며 복닥거리다 보니 어느덧 골목에 가장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올해 10월이면 3주년. 갈수록 독서 인구도 줄고 지원 예산도 줄어든다는데, 골목에 작은 책방 하나 팬데믹도 버텨내고 대견하게 살아남았다.

책방에서 한담을 나누던 오후 다섯 시. 통창으로 햇볕이 쏟아졌다. 주택과 주택 사이에 지는 해가 걸릴 무렵, 이때만 책방에 잠시 쏟아지는 볕이 있었다. 책들도 식물도 우리도 나른하게 볕을 쬐었다. 책방 앞에 놓아둔 벤치에 지나가던 할머니들도 앉아서 볕을 쬐었다. 잠시 그대로 모두 말없이 안온한 시간.

한 소쿠리 끌어모아 와르르 쏟아부은 듯한 가을볕은 유달리 따뜻했다. 편히 내어둔 내 마음도 잘 데워졌다. 이 시간, 이 자리, 이 분위기를 나는 좋아해. 책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봄비 내리던 아침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글 나누던 학인들. 여름비 쏟아지던 밤에 모여서 타닥타닥 글 쓰던 동료들. 다글다글 햇밤을 나눠 먹던 가을과 부슬부슬 첫눈 날리던 겨울에도, 책방에 찾아와 대화 나누던 독자들을 기억한다. 마주 보았던 얼굴들이 아른아른, 문득 보고 싶었다. 모두 잘 지내는지.

책방은 책만 파는 가게가 아니다. 책과 사람 이야기가 깃든 하나의 정경(情景)이다. 앞만 보고 바삐 걸어갈 땐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지. 책 볼 겸 사람 볼 겸 오가는 발길이 익숙해질 때 이야기는 생겨난다. 계절의 정취와 동네의 정서와 책의 서정과 사람들 대화가 스민 이야기가. 이를테면, 한담을 나누다가 다 같이 하오에 쏟아지는 볕을 쬐던 가을 책방 정경 같은 것. 언젠가 장소가 사라진다 해도 오래도록 그리워할 풍경일 테다.
#가을#책방#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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