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는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다. 구본창은 그 비누를 찍는다. 구본창의 비누 사진은 일상 소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 현대 사진 흐름의 일부다. 그런데 왜 하필 비누란 말인가. 비누는 소모품이다. 오랫동안 곁에 두고 함께 할 손때 묻은 물건이 아니라, 잠시나마 곁에 묻어온 손때를 씻어낼 일상의 소모품이다. 자기 글을 길이길이 남기고 싶다? 바위에 새겨라. 후대에게 길이길이 전해질지니. 자기 글이 곧 사라지게 하고 싶다? 비누에 새겨라.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소모될 터이니.
비누는 소진, 소멸. 그것도 꾸준하고 느린 죽음을 표상하기 좋다. 부서진 비누는 예정된 파멸을, 빈틈없이 진행되어 온 소진을 증명한다. 비누의 속성은 소진되는 데 있고, 구본창은 바로 거기서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구본창이 찍은 그 어떤 비누도 멀쩡하지 않다. 구본창은 그냥 비누를 찍는 게 아니라 녹고 마모되고 닳은 비누를 찍는다. 구본창이 포착한 비누는 이미 소진 중이었으되, 지금쯤은 더 소진되거나 사라져버렸을 비누다. 구본창의 비누는 아름답게 죽어가는 비누다.
그리하여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보는 사람은 비누를 보는 게 아니라 비누가 경험한 시간을 본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시간이 있고, 사물에는 사물의 시간이 있다. 인간은 자신을 마모하고 있는 시간을 의식하지만, 비누는 자신을 녹이고 있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다. 시간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시간 속의 비누를 봄으로써 인간은 비누가 경험한 혹은 경험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상상한다. 비누의 시간을 상상하며, 자기 역시 필멸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사진은 시간에 의해 구타당한 존재의 상처를 찍기 좋은 매체다. 사진은 소진, 소멸, 죽음, 그것도 꾸준하고 느린 죽음을 환기하기 좋은 매체다.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에서 사진에는 존재 증명과 부재 증명이 공존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사진은 “그것의 지시 대상을 상실한 모습처럼 읽힌다”, 사진은 “미래의 죽음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사진은 현장에 피사체가 존재했음을 증명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과거의 일이라는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피사체의 부재까지 환기한다.
그림은 사진만큼 이 일을 잘 해낼 수 없다. 대상이 거기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식을 사진만큼 통절하게 일깨우지 못한다. 그림은 사진만큼 대상의 존재를 확증하지 않기에 깊은 멜랑콜리를 남기기 어렵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죽은 배우의 그림이 아니라 죽은 배우의 사진이 멜랑콜리를 남긴다. 마치 죽은 가수의 녹음된 목소리가 우리에게 마음의 생채기를 남기듯이.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태그(1933∼2004)는 말했다. 피사체는 찍혔다는 바로 그 이유 하나로 비애감을 띠게 된다고. 실로 사진은 필멸자에게 적합한 매체다. 그래서 사진을 보며 우리는 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구본창은 결국 덧없음을 찍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구본창은 덧없음과 더불어 영원을 찍는다. 이것은 필멸자인 비누가 사진으로 복제되어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구본창의 카메라에 포착된 비누는 그 순간 잠시 정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지 순간은 사진가 로이 디커러바가 말한 장대높이뛰기의 정지 순간과도 같다. “나의 사진은 즉각적이지만, 동시에 영원하다. 내 사진은 영원이 되는 어떤 순간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경우와도 같다. 자, 그는 뛰기 시작한다. 마침내 솟구쳐 오른다. 다시 낙하한다. 그런데 그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다. 그는 솟구쳐 오르지도 낙하하지도 않는다. 그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린다. 바로 그 순간에 모은 힘들이 융합하고, 모든 것들이 평형을 이룬다. 그것이 영원이고, 그것이 재즈다.” 구본창은 비누가 경험한 시간에서 영원을 포착한다.
구원이란 시간의 수인(囚人)이 되는 일도 아니고 아예 시간이 없는 곳으로 탈옥하는 일도 아니다. 구원이란 자신이 시간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영원 속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영원에 접속된 사진은 이제 피사체의 매개체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매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사물이다. 그리하여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가 현실 속 어느 특정 비누를 찍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그때 망막에 맺히는 것은 더 이상 특정 대상의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미적 위엄을 가진 별도의 존재다.
한갓 비누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더러워져 간 시간이지만, 비누의 삶은 남의 더러움을 씻어내 간 시간이다. 그래서 비누의 시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자기 파괴를 통해 얻은 아름다움이다. 자신의 효용을 다할수록 비누는 점점 작아져 간다, 부스러져 간다, 사라져 간다. 더러운 무엇인가를 씻고, 그 결과 자신은 사라져 간다. 사진가 구본창은 비누에서 자기 파괴적 구세주의 면모를 포착한다. 비누는 보급형 구세주다. 비누 사진은 보급형 성화(聖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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