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금희]답장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1일 0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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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지식을 얻고 사람들 만나게 하는 매개
도서 관련 사업 및 예산, 폐지와 축소에 우려 커
우리 미래에 과연 책의 자리는 있는지 의심된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는 ‘파이 이야기’의 작가 얀 마텔이 쓴 편지 모음집이다. 수신자는 캐나다 총리였고 마텔은 격주 간격으로 책 추천과 함께 역사, 문학, 철학을 아우르는 장쾌한 편지를 보냈다. 바쁜 총리를 위해 세심하게 책도 직접 사서 동봉했다. 그렇다면 답장은 받았을까. 대작가와 서신 교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그 역시 정성스레 자기 감상을 적어 보냈을까. 가장 좋아하는 책이 ‘기네스북’이라고 밝힌 그에게서는 침묵 혹은 무시라는 답신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담당 공무원의 의례적인 감사 편지가 올 때도 있었다. 정부 계획을 더 알고 싶으면 홈페이지를 참고하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마텔은 정직성을 판단하기 위해 공직자들이 재산을 어떻게 축적했는가를 알아야 하듯, 공적 자리에서 시민을 ‘지배’하게 된 이가 어떤 정신적 자산을 지녔는지 공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관련된 정보이니 어쩌면 더 중요했다. “그의 꿈이 자칫하면” 우리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으므로 그는 총리와 책을 통해 대화하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텔이 이런 작업을 결심한 건 창립 50주년을 맞은 캐나다 예술위원회 기념행사에서 정부 공직자들이 보여준 무례한 태도 때문이었다. 캐나다 예술위원회는 창작자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해왔고 마텔 역시 그 지원 덕분에 첫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 시작이 없었다면 영화로도 제작돼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린 파이 이야기는 결코 창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단체가 맞은 역사적인 행사에서 정치인들은 5분 정도의 스피치를 한 다음 퇴장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총리는 심지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그런 무자비한 홀대에 충격을 받은 마텔은 편지 투쟁을 시작한다.

요즘 정부 예산과 관련한 소식을 들으면 이 정부가 구상하는 미래에 과연 책의 자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연초에 내가 살고 있는 구에서 도서관 예산을 삭감하고 작은 도서관들을 스터디카페로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시민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책의 역할에 무관심한 공직자들이 벌이는 황당한 정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책과 관련한 사업과 예산들을 통째로 없애거나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국내의 우수 문학 도서를 선정해 도서관 등을 통해 널리 알리는 문학 나눔 사업이 없어졌고 어린이들에게 책을 지원하고 각지의 독서 모임을 활성화시켜 왔던 ‘국민독서문화 지원 예산’도 전액 삭감되었다. 지방의 문화거점 역할을 맡아 오던 지역 서점 활성화 지원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쯤 되면 마텔의 말대로, 이 정부가 그리는 미래적 상상력이란 ‘책의 소멸’이 아닐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지식을 얻고 감정의 근육을 키우며 숙고의 방법을 얻을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책의 효용 외에 요즘 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는 점이다. 스터디카페에도 사람이 모여 있지만, 그곳은 침묵 속에 자기 과제를 수행하는 여전히 고립적인 장소이고, 도서관과 서점은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여 자기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인간적 온기를 높일 수 있는 실제의 만남들이 성사되는 곳이다.

홀로 앉은 사람은 자기 일신의 일에 주로 집중하지만, 같이 모이면 ‘다수의 인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고립을 현시대의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하면서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들을 위기로 몰고 가는 정책들은 무지를 넘어 퇴행적으로까지 읽힌다.

이 시대에 책을 읽고 쓰고 만들고 파는 일은 어느덧 ‘마이너의 세계’가 되었다. 그것은 책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책이야말로 이 세계의 속도에 제동을 걸 유일한 지성소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쌓아놓은 헤아릴 수 없이 높은 책의 계단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을 위해 동네 서점이 있고 도서관이 있으며 그리고 정책이 있다.

돈을 내지 않아도, 물건을 사지 않아도, 시민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내주는 이 도시의 마지막 벤치, 포기할 수 없는 이 자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착잡함이 들고 자주 골똘해지는 가을이다. 하지만 그동안 책의 세계에서 일생 자양분을 얻어온 내가 먼저 낙담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 역시 마텔처럼 어느 날에는 편지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기관의 의례적인 답장조차 없겠지만 정책만 바로잡힌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첫 편지에서는 마텔의 이 책을 소개하며 과연 대통령은 그동안 어떤 책들을 주로 읽었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발견하고 환호하며 샀던 곳 역시 경남 진주의 작은 동네 서점이었다.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파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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