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대전에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음주운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배승아 양의 오빠 송승준 씨는 장례를 치른 뒤 거의 매일 국회 홈페이지를 찾고 있다. 동생이 떠난 뒤 정치권에서 우후죽순으로 내놓은 법안들이 제대로 추진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음주운전 방지 관련 법 발의에 누가 참여했고, 언제 상임위가 열리는지 등을 일일이 점검한다고 했다. 국회에서 관련 회의가 열리면 회의록까지 꼼꼼히 읽는다. 어느 의원이 적극적인지 등도 체크한다고 했다. 송 씨는 “승아가 떠나고 한 달 지나자 국민들의 관심도 줄고 국회 논의도 더뎌져 답답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 승아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의미 없이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겨진 승아의 친구들이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게 하려면 ‘승아의 비극’이 잊혀져선 안 된다고 여겼다고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희생자가 또 나올 수밖에 없다고 봤다. ‘배승아’라는 이름이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을 조금 더 오래 유지시키는 동력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유족들의 간절함은 조금씩 변화를 만들고 있다. 승아가 떠난 지 6개월 만에 상습 음주운전자에게 시동잠금장치를 의무 부착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르면 내년 말부터 5년 내 2회 이상 음주운전이 적발된 경우 이 장치를 부착해야 면허를 재발급받을 수 있다. 이 장치가 부착되면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음주 측정을 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상습 음주운전자의 음주운전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장치다. 미국 유럽 등에선 한참 전 도입돼 큰 효과를 보이고 있지만, 국내에선 승아 양이 떠나기 전까지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
법 통과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본보가 승아 양 사고 직후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법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올 5월 1호 법안을 발의했을 때만 해도 금방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장치 설치 비용 등이 이중 처벌이라는 지적 등이 나왔다. 정치권 안팎에선 ‘총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민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왔다.
국회 상임위 논의는 수개월째 답보 상태를 보이다 9월에야 여야의 우선 처리 민생법안으로 상임위를 통과했고, 10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 관계자는 “여당이 의지를 잃지 않고 이 법을 여야 협상 테이블에 올린 건 ‘배승아’라는 이름이 갖는 힘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송 씨는 “시동잠금장치법이 통과되면서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상습 음주운전자의 신상 공개 및 처벌 강화, 스쿨존 방호울타리 의무화 등 승아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민생법안들을 통과시킨 여야 내부에선 ‘총선 준비도 바쁜데 이 정도면 할 만큼은 했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여전히 수북이 쌓인 법안 하나하나에 또 다른 승아들의 이름이 서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