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1927∼2023)
대시인께서 작고하셨다. 상복을 입고 출근했다가 장례식장에 찾아갈 참이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김남조 시인의 소식을 전하는데 금방 알아듣지 못한다. ‘겨울 바다’를 지은 시인이라니까 많이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는 시의 구절을 읊어주니 대부분 알아챈다. 시인은 작품이 되어 남는다는데, 김남조 시인은 이제 영원히 사실 수 있겠다.
우리 학생들 나이가 딱 스물인데 나도 딱 스무 살에 김남조 시인을 처음 뵈었다. 자택으로 인사드리러 갔는데 안에 들어가니 컴컴했다. 여기저기에 향초들로만 불을 밝혔고, 성모상이 있는 모습이 꼭 수도원 같았다. 그렇게 경건한 분위기와 기도 속에서 ‘편지’와 같은 시가 탄생했을 것이다. 만난 첫날부터 기도를 해주셨다. 이후로도 만나면 장하다고 칭찬해 주시고 사인을 부탁하면 ‘축원합니다’라고 써주셨다. 지금 잘한다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너는 잘할 거라는 축복이었다. 좌절감과 자책감에 머리 뜯고 있을 때 그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든 잊지 못하게 된다. 나만 특별하게 받은 것은 아니다. 긴 시간 동안 시인은 시와 편지와 축원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구원해 주었다.
갚고 싶었는데 갚지 못했다. 편지를 받기만 하고 답장은 하지 못한 꼴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는다. 충만하고 고결했던 시인님,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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