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지역 분쟁을 부추기는 요인들이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구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강경파들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도모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는 구조가 공고화됐다는 점. 폭력과 갈등은 되풀이된다.
이 폭력의 악순환을 해부한 작품이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작 영화 ‘뮌헨’이다. 영화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이른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 현장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포로 석방을 요구했는데, 서독 경찰의 대응 실패로 인해 결국 인질 모두 숨진 사건이다.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팔레스타인인 11명을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5인조 암살단을 구성한다. 모사드 출신 비밀 요원 애브너(에릭 바나)가 리더로 암살단을 이끈다.
하지만 애브너는 목표물을 제거할수록 혼란을 겪는다. 복수를 해도 상대 조직 인사가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고, 새로운 제거 목표가 생겨나며 도무지 복수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으로는 악의 종식을 이룰 수 없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돼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 암살 팀원들 역시 정체불명의 조직에 의해 하나둘 목숨을 잃으면서 복수의 대상은 더 늘어나고, 자신도 언제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영화에선 무고한 테러리즘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복수심과 팔레스타인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에 투신하는 마음을 모두 온정적으로 다룬다. 이로 인해 영화는 다루기 어려운 복잡한 과제에 용감하게 도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덧없는 양비론과 평이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밋밋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뮌헨 올림픽 참사가 큰 트라우마로 새겨진 이스라엘에서도 비판받고, 이슬람권에선 대부분 상영되지 못했다.
이처럼 첨예하고 당장 피해가 발생하는 사태에서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해답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무력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에 무관심하고 충성만을 요구하는 비정한 국가와 조직의 작동 방식을 다룬 점은, 예술이 늘 그러하듯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든다. 숭고한 대의로 움직이는 시스템은 개인의 마음을 황폐화시키며,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영화가 다루는 1970년대의 잔혹 복수극 이후로도 피가 피를 부르는 잔혹 사태는 이어지고 있다. 개인의 자리가 줄어들고, 복수를 수행하는 거대 정치의 비중 영역이 커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대로 복수를 수행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영화에서 암시한 대로 복수의 시스템이 정확하게 작동할수록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다.
최근 이스라엘 정치권은 강화된 안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을 협력 대상으로 보지 않는 기조가 팽배해졌다.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도 친아랍 목소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립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극우 강경파 비중이 점차 몸집을 키워 왔으며 갈등이 누적됐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는 무장정파 하마스 역시 통치 무능과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국을 전환하려는 목적으로 극단주의에 입각한 테러리즘을 획책하는 경향이 더 심화됐다. 팔레스타인 민중 상당수는 하마스의 무능과 폭력성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다.
여기에 중재를 외치지만 자국 이익에 따라 적당히 폭력을 용인하고 때맞춰 수습하는 이집트 등 주변 아랍 국가와 이란, 미국, 중국,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보복과 복수를 반복하는 저주에 빠졌다. 대립이 격화될수록 사람들의 피가 맞교환된다. 정치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건 무고한 이들이다.
50년 전 참사를 다룬 20년 전 영화가 지닌 메시지는 지금도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영화는 핏빛 복수 속에서 죽음을 목격할 가족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에도 있고, 팔레스타인에도 있다. 남겨진 이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휴머니즘만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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