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플랑드르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뛰어난 화가이자 수완 좋은 외교관이었다. 유럽 여러 왕족에게 그림을 주문받으며 이른 나이에 부와 명성을 누렸다. ‘전쟁의 결과(1637∼1638년·사진)’는 그가 60세에 그린 말년 대표작이다. 신화나 성경 주제의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왜 말년에 전쟁화를 그린 걸까?
당시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 중이었다. 종교 갈등에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뒤섞이며 복잡한 양상으로 치달았던 전쟁은 약 800만 명이 희생된 유럽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였다.
루벤스는 이 끔찍한 전쟁의 비극을 신화 속 다양한 상징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림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무장한 군인은 마르스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그는 발로 책과 그림을 짓밟고 있다. 전쟁으로 예술과 문자가 파괴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를 말리는 누드의 여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다. 마르스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애원하고 있다. 아들 큐피드와 천사들도 함께 말리고 있다. 횃불을 높이 들고 마르스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건 알렉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분노의 화신이다. 그의 주변에 있는 괴물은 전쟁에서 기인한 역병과 기근을 상징한다.
바닥에 등을 보이며 쓰러진 여성이 손에 든 악기는 류트다. 조화를 상징하는 류트는 목이 처참하게 부러졌다. 쓰러진 군인 뒤로 보이는 젊은 엄마는 우는 아이를 안고 공포에 떨고 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과 아이를 상징한다. 왼쪽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유럽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화가가 절망만 그린 건 아니다. 맨 왼쪽 천사의 손에 지구본이 들려 있다. 검은 옷 여인이 온몸으로 막아내며 건네준 것이다. 그것이 종교든, 나라든, 신념이든, 가족이든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 지구본은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화가의 염원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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