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을 나누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234〉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9일 23시 39분


날 버리고 떠난 지난 세월 붙잡을 수 없고, 내 맘 어지럽히는 지금 시간 근심만 가득하네.
세찬 바람에 만 리 먼 길 날아온 가을 기러기, 저들 바라보며 높은 누각에서 술을 즐긴다.
그대 문장엔 건안(建安) 시대의 강건한 기개, 내 시엔 그 다음 시대 사조(射眺)의 청신한 기풍.
우리 함께 빼어난 취향과 장대한 의지로 비상하여, 저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으려 맘먹었건만…
칼 뽑아 물을 베니 물은 더욱 세차게 흐르고, 잔을 들어 시름을 삭이니 시름 더욱 깊어지네.
이 세상 인생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

(棄我去者昨日之日不可留. 亂我心者今日之日多煩憂. 長風萬里送秋雁, 對此可以酣高樓. 蓬萊文章建安骨, 中間小謝又淸發. 俱懷逸興壯思飛, 欲上靑天攬日月. 抽刀斷水水更流, 擧杯銷愁愁更愁. 人生在世不稱意, 明朝散髮弄扁舟.)


―‘선주 사조루에서 교서 벼슬을 하는 아저씨 이운을 전별하다(宣州謝脁樓餞別校書叔雲·선주사조루전별교서숙운)’ 이백(李白·701∼762)





한순간 반짝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지난날의 영화는 간데없고 도처를 떠돌며 수심에 찬 나날을 보내야 했던 이백. 벼슬을 구하려고 세도가들에게 자천(自薦)의 글을 보내기도 하고, 또 자신의 시명을 알아주는 부호의 문객(門客)이 되어 시주(詩酒)를 즐기며 호방한 척 초연한 척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아저씨뻘 되는 이를 전별하려고 누각에 오른 시인.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소외의 울분을 나누려 하고 있다. 아저씨의 문장은 한대 말엽 건안 시대 조조(曹操) 등이 보여준 강건한 기개를 닮았고, 저 역시 육조 시대 산수시의 개조(開祖)인 사조(謝脁)의 참신한 시풍을 계승했다 자부하지요. 허나, 남다른 취향과 의지를 가진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칼 뽑아 물을 베니 물은 더욱 세차게 흐르고, 잔을 들어 시름을 삭이니 시름 더욱 깊어지듯’, 우리가 갖은 애를 다 써봐야 도무지 세상은 인재를 몰라주는 것을. 인생살이 이럴진대 강호(江湖)에 묻혀 사는 수밖에요.

#울분#동병상련#자천#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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