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요? 무조건 외국 대학 보내야죠. 국내 대학 보내서 뭐 해요. 나라가 없어지게 생겼는데….”
최근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를 만나 얘기하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이른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학부모인데 입시를 물었더니 난데없이 저출생 현상을 거론하는 답이 돌아온 것이다.
대치동 학부모는 대한민국 어느 학부모보다 교육 정책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최신 입시 전략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전문가들이다. 이 학부모도 이미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며 학군을 고려해 사는 곳까지 대치동으로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다 수십 년 후 나라가 없어질지 모르는데 아이를 의대나 법대에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최근 이런 얘기를 하는 강남 엄마들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했다. 저출생 문제를 먼 미래가 아닌 코앞에 닥친 위기로 인식하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40년 전인 1983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는 평균 2.06명이었다. 합계출산율이 2.1명 미만이면 저출산국가로 분류되는 기준에 따라 그때 이미 저출산국가로 분류됐다.
그런데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아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쳤고 2001년 초저출산국가(1.3명 미만)가 됐다. 그 이후인 2005년에야 정치권은 부랴부랴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만들고 예산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15년 넘게 280조 원을 투입한 결과는 처참하다. 지난해 출산율은 0.78명,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저출생 경고등은 수십 년 전부터 켜져 있었다. 하지만 정치권과 정부는 선심성 현금 지급 정책만 남발했을 뿐 문제를 해결하지도, 문제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21대 국회에선 인구위기특별위원회를 꾸려놓고 10개월 동안 회의를 고작 4차례 열었다. 저출생 관련 법안은 435개 발의했지만 본회의를 통과한 건 19개에 불과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모두 지난해 대선에서 저출생 해결을 공약했지만 체감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내년 총선 공천에 사활을 거는 국회의원들은 국가적 과제인 저출생 문제 대신 지역구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여권에선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책임 공방을 벌이며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유치한 논쟁을 하는 그 순간에도 저출생 상황은 더 악화되고, 국가적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여당 대표를 지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저출생 문제 해결 못 하면 나라 망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국가적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고민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만난 정치인 중 누구로부터도 저출생 문제를 진정성 있게 고민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정치인들이 강남 엄마들보다 저출생 문제에 무관심하다면 정말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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