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중국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성장하였고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그것이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한반도 중남부도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는 농사 짓기가 일반화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큰 마을이 만들어졌으며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생겨났다.
이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 충남 부여에 있으니 송국리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유적은 정말 우연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마치 ‘야외박물관’처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유적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최초로 온전히 드러난 비파형 동검
1974년 4월 19일, 김영배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장 일행은 부여로 내달았다. 3년 전 공주 남산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주민 최영보 씨가 도굴 위험이 있는 옛 무덤을 발견했으니 급히 와 달라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초촌면 송국리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최 씨가 안내한 곳에는 돌판을 조립해 만든 무덤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도굴을 우려하여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겉흙을 제거하자 곧 길이가 2.6m나 되는 석관묘 뚜껑돌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것을 들어 올린 다음 내부 흙을 제거하던 중, 김 분관장은 마침내 한 무더기의 석촉과 함께 동검 한 점을 발견했다. 국내 최초로 온전한 형태를 갖춘 채 비파형 동검, 즉 요령식 동검이 발굴되는 순간이다.
같은 해 10월 8일, 출토 유물이 공개되자 주요 언론은 “요령식 동검 등 발굴, 청동기문화 존재 입증”, “‘한국 청동기문화 시대 부재’ 日 주장 뒤엎은 쾌사(快事)” 등으로 대서특필했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발굴된 동검 한 자루가 한국 고고학계가 품고 있던 고민을 일소했고, 국가사적 ‘부여 송국리 유적’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 해명의 신호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석관묘는 중요도 때문인지 그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발굴됐다. 특히 1993년에는 무덤을 다시 판 다음 멋진 원색 사진 촬영을 위해 뚜껑돌을 물로 씻어내다가 별 그림으로 알려진 크고 작은 둥근 홈(성혈·性穴) 74개를 찾아냈다.
벼농사에 익숙했던 송국리 주민들
1975년, 송국리 일원 80만 ㎡가 농지 확대 사업 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조사를 벌인 결과, 곳곳에서 청동기시대 움집터와 유물을 찾아냈다. 그에 따라 개발 사업은 전격 취소됐고 이 유적은 이듬해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그 이후 오랫동안 발굴된 움집터는 윤곽이 네모난 것과 둥근 것으로 나뉘는데, 네모난 것 가운데는 불탄 사례가 여럿 있었다. 화재 원인이 취사 과정의 실화인지, 외부 공격 때문인지 논란이 있다. 불탄 움집터에서는 쌀, 조, 기장, 콩, 팥, 밀 등의 곡물이 불탄 채 수습됐다. 그 가운데 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송국리 주민들은 이미 벼농사를 익숙하게 지었고 쌀이 주요 먹거리였음을 알려준다.
1975년 발굴된 움집터 가운데 하나에서 매우 중요한 석기가 출토됐다. 길이가 11.6cm에 불과한 자그마한 돌 조각이었는데, 파손품이지만 잘 다듬어진 것이라 조사원들은 별도로 수습해 물로 씻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쪽 면에 요령 지역에서 종종 출토되는 이른바 ‘부채형 날을 가진 청동도끼(선형 동부)’ 모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조사단은 송국리 유적이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면서 한반도 중남부 청동기문화의 기원이 요령 지역이고, 송국리 일원에서 청동기가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다고 설명했다. 근래에는 이 유적의 상한을 기원전 9세기, 하한을 기원전 5세기로 올려보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1991년, 이 유적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의 기획발굴이 시작됐다. 조사 목적은 벼농사를 지었던 경작지 확인이었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듬해에는 방향을 바꿔 마을 외곽의 방어시설을 찾아보기로 했다.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실마리가 드러났다. 움집터 주변에서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판 큼지막한 구덩이들이 열을 지어 드러난 것이다. 그 가운데는 너비가 165cm, 깊이가 110cm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방어 목책인가, 종교적 통로인가
조사단은 이를 목책으로 보고 조사를 이어갔다. 이듬해까지 송국리 유적 평탄면의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가면서 조성된 기둥 구멍 열 수백 m를 찾아냈다. 당시에는 1줄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그때는 조사 구역에 작물이 식재되어 있었기에 기둥 구멍이 지나가는 부분만 피해를 보상해 가면서 조사를 진행하였기에 유적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이 유적의 성격은 ‘방어 취락’으로 진화했다.
2008년, 한국전통문화대 조사단이 송국리 유적에 대한 발굴을 개시하면서 이 유적의 성격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과거 국립박물관이 조사한 구역 주변으로 넓게 확장 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간 몰랐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과거에 확인한 큼지막한 기둥 구멍들은 재조사 결과 대체로 2줄이었는데, 각 줄 기둥 중심부 사이의 거리는 대개 3m 정도이다. 조사단은 그 가운데 일부는 거대한 지상식 가옥의 흔적이고, 또 일부는 목책이라기보다 마을 혹은 의례(儀禮) 건물로 접근하기 위한 통로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송국리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다 되었다. 그간의 발굴 및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송국리 일대에는 논농사에 기반한 거대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는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주민을 동원하여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는 유력자가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이 청동기 마을이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하였는지, 혹은 소비만 하였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수백 m에 걸친 나무 기둥 열의 성격이 무엇인지, 마을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주변에 논과 밭이 존재하는지 등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장차의 발굴 및 연구를 통해 여러 의문점이 차례로 해명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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