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직후인 2017년 6월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국회 의원실에서 만난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탄핵 후 치러진 대선의 열기가 남아 있던 때였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새 정책을 꺼낼 동력도 없다”고 했다. “대선으로 나타난 민심과 달리 보수가 원내 의석에 ‘과잉 대표’돼 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 스스로 야당과 협치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5년 단임 대통령의 1, 2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하고 하는 말로 들렸다.
“용산의 비서실장부터 수석, 비서관 그리고 행정관까지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고 국민들의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 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19일) “컴퓨터로 화면 쳐다보는 행정, 보고서로 밤새우는 행정이 아니라….”(2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의 쓰라림을 단단히 맛본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현장론’을 설파하고 있다. 취임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민심을 다시 읽으라는 주문을 보며 문득 문 전 의장 발언이 떠올랐다. 두 달이 지나 해가 바뀌면 어느덧 이 정부에 ‘집권 3년 차’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참모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들으면 답이 나올까. 시장 상인의 어려움, 취업하기 힘든 청년,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 환율 변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의 고충을 현장에서 들으면 민심을 달랠 수 있을까. 글쎄다. 어떤 아이디어가 나올지 아직 모르지만, 지금 문제가 어디 현장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들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과 가깝고 그를 극히 아끼는 사람들조차도 “지금 여권에 위기감이 있기는 한가”라는 말도 한다.
용산이 짚고 또 짚었고, 머릿속에 새겨야 할 현장은 널렸다. 용산이 현장을 안 챙겼던 것도 아니다. 지난해 8월 신림동 반지하 일가족 침수 사고 현장, 산사태 현장도 그는 직접 찾았다. 전임 대통령과 달리 ‘혼밥’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공개·비공개 일정도 많고, 지금도 중동 외교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런데도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의 비극은 사람을 달리해 계속 일어난다. 이 정부에서도 대기업 제빵공장 근로자 손 끼임 사고와 희생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책상에서 답이 안 나올 때 흔히 현장을 가라 하지만, ‘현장’이 성공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덜컥 뭐라도 얻어걸리라는 심정으로 나가 운 좋게 성과가 날 때도 있지만, 또렷한 문제의식 없이 쑤시고만 다니면 될 일도 그르치거니와 현장을 겉돌 뿐이다.
현장을 찾는 절박감만큼 필요한 것은 철저한 회고다. 현장의 뜨거움만큼이나 냉철한 숙고와 판단도 필요하다. 가령 “10년도 훨씬 전에 고위직을 지낸 이들이 다시 고관대작에 오르고, 인사청문회장에서 ‘드라마틱 엑시트’를 실천할 인사를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의사 결정 과정은 어땠는지. 사람이 없는지, 인사 시스템이 문제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도 그중 하나이겠다. 보선 패배 이후 여당 지도부 구성에 물밑 영향을 끼치려 한 인사를 향한 말도 나온다. 유명 드라마 대사처럼 현장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장도, 책상 앞도 다 중요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