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의 원뜻은 ‘우상’으로 사람이 숭배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담아 우상을 만들고 그들에게 다양한 춤과 노래로 제사를 지냈다. 이후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아이돌은 맹목적인 종교의 대상에서 수많은 대중을 감동시키는 아티스트를 의미하는 뜻으로 변하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아이돌이 전 세계를 휩쓸기 전 삼국시대부터 한국의 예술인들은 동아시아 곳곳에서 명성을 날렸고, 그 배경에는 2500년 전부터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던 실크로드의 아이돌이 있었다. 고고학이 발굴해낸 2000년이 넘는 한국 아이돌의 역사, 그리고 그 원류인 실크로드 예술을 찾아가 보자.》
음악과 춤 교류의 장, 실크로드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실크로 대표되는 사치품의 교역을 떠올린다. 향목이나 값비싼 광석 같은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는 배를 이용하는 해상 교역과 달리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카라반)은 짐승의 등에 일일이 실어서 날라야 한다. 그러니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의 주요 물품은 향료, 보석, 비단같이 가볍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육상 실크로드에서 물건보다 더 중요한 교류가 있었으니, 사실 실크로드를 통해 오간 진정한 산물은 물건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다.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각자의 개인기를 배경으로 사방으로 오가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던 곳이 바로 실크로드였다. 수많은 언어와 문화의 다양한 민족이 교차하는 실크로드였으니 말이 없이도 통하는 음악과 춤, 팬터마임, 이국적인 동물과 벌이는 서커스들이 발달했다. 그리고 많은 예술인은 당시 동아시아를 통합하면서 다양한 문화가 섞여 국제화되던 당나라에서 널리 활약했다.
지금도 여러 명의 댄서가 마치 자로 잰 듯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칼군무’나 빠르게 회전하며 춤을 추는 모습은 인형이나 벽화의 형태로 수많은 당나라 무덤에서 발굴된다. 당나라의 국제화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역으로 이어지는 경제적인 이익과 함께 그들을 하나로 묶는 예술과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나라의 선율은 이국적인 무용 및 패션과 결합해 당나라의 사람들을 황홀하게 했다. 실크로드의 음악이 한참 들어올 때는 낙양의 집집마다 그들의 음악을 배우는 소리로 넘쳐났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으로 공유되는 케이팝의 열풍이 이미 1300년 전 낙양 일대에서 널리 유행한 셈이다. 이렇듯 중국 문화의 융성기로 불리는 당나라의 융성한 문화 배경에는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소프트파워가 있었다.
英, 고조선에 전파된 실크로드 하프
다양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실크로드의 음악과 기예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놀랍게도 20세기 세계 대중음악을 뒤흔든 영국에서도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1940년대에 발굴된 동앵글리아의 왕족 고분인 ‘서턴 후(Sutton Hoo)’ 고분은 세계 각국의 보물로 가득 찬 브리티시 박물관(대영박물관)에서 거의 유일한 고대 영국의 유물이니, 가히 고대 영국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이 발굴을 주제로 한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제작될 정도로 유명한 이 고분에서는 유라시아 훈족에서 기원한 화려한 황금 유물들과 함께 하프가 출토되었다. 이 하프는 지금의 하프보다 훨씬 작아서 말 위에서 켤 수 있는 것인데, 2018년 카자흐스탄의 서기 4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서턴 후의 것과 똑같은 하프가 발견되었다. 흉노의 멸망 직후 유라시아에서 발흥한 훈족은 유럽으로 이동하며 기마술, 황금예술과 함께 음악과 악기도 함께 전래시켰고, 그 끝은 영국임이 증명된 셈이다.
이런 실크로드의 손하프는 고조선으로도 유입됐으니 고조선의 최초 노래인 ‘공무도하가’의 다른 이름이 하프의 일종인 공후를 딴 ‘공후인’이다. 적어도 2200년 전에 이미 고조선은 실크로드를 통해 하프를 타는 전통이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세계 유행 음악을 주도하는 영국과 한국의 고대에는 실크로드에서 유입된 음악이 있었다.
中日에서 유행한 고구려, 발해 음악
아이돌은 신라에도 있었다. 신라 토우에 새겨진 수많은 장면에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춤을 추고 나팔을 연주하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는 정작 신라의 관악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태평소로 불리는 ‘쇄납’이 있으니, 이는 페르시아의 ‘수르나이’ 또는 ‘주르나’에서 기원한 것으로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악기이다. 그 밖에 수많은 악기가 신라에 채용돼서 발달했다. 다른 유물과 달리 음악과 같은 소리는 고고학 유물로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음악에 열중하는 악사, 그리고 그를 보며 황홀경에 취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의 토우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실크로드의 음악이 꽃핀 또 다른 나라는 발해와 고구려였다. 실제로 고구려 벽화에는 실크로드와 중국 등 여러 지역과 교류하며 화려한 음악과 무용으로 위세를 떨쳤던 고구려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고구려의 음악은 멸망된 직후 당나라로 대거 유입되어서 100년 넘게 당나라 궁중과 도시 곳곳에서 연주되었다. 나라를 잃고 당나라 곳곳에서 정착했던 고구려의 유민들도 그 음악을 즐기며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음악은 특히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발해의 악기 중에는 2014년 연해주에서 발굴되어 한국에도 소개된, 초원에서 발달한 악기인 구금도 있다. 작은 금속판을 입에 끼우고 입안을 공명통 삼아 튕기는 이 악기는 약 4000년 전부터 북방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만 연주되던 악기였다. 발해는 만주 지역에서 이 악기를 최초로 도입했고, 이후 구금은 일본의 사이타마 지역에서도 발견되었으니, 발해가 전한 것이다.
실제로 발해악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일본으로 발해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때는 반드시 예술인들을 대동했다. 이후 헤이안시대를 거쳐 ‘보카이카쿠(渤海樂)’는 일본 궁중 음악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헤이안시대에 반대로 그 음악을 체화시켜 발해를 거쳐 당나라로 무희들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송나라와 금나라의 궁중에서도 발해악이 연주되었고, 심지어는 너무 인기가 있어서 금지했다는 기록마저 있었으니 가히 케이팝의 기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융화와 창의성이 케이팝의 기반
삼국시대 이래로 한국의 예술문화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데는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다양성에 기반한 예술적 특성이 있었다. 원조를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문화의 융화와 창의성이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케이팝과도 상통한다. 적당히 신선하되, 언어를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낸 그 음악의 정점에 실크로드와 한국의 케이팝이 있다. 그 역동성은 서로의 치열한 경쟁과 통합으로 유지되었다. 실크로드는 결코 한 지역이 아니다. 쿠차, 고창, 카슈가르, 안국(부하라), 강국(사마르칸트), 천축(인도) 등 각 지역의 음악은 서로 경쟁하며 당나라에서 경쟁했다. 때론 쿠차의 피리가 인기를 끌기도 하다가 북방 유목민의 군악대가 인기를 얻고, 다음에는 인도식 음악이 유행하는 식이었다.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지는 옮겨갔다.
그들의 패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라의 문호 최치원이 쓴 ‘속독(束毒·소그드를 뜻함)’에도 잘 남아있으니, 곱슬머리를 한 파란 가면을 쓴 이국적인 사람들의 음악과 춤을 노래한 것이다. 이국적인 외모와 화려한 비단으로 수놓은 첨단 패션의 옷을 입은 악단과 무희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주었다. 이렇듯 이질적인 실크로드의 예술과 음악이 한반도에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함께 즐기며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용인하고 즐기던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케이팝의 실체는 한민족만의 위대함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조화시킨 거대한 용광로다. 우리만의 문화라는 자긍심 대신에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공통적인 관심을 찾아내고 즐거움을 주었던 고대 실크로드와 한국의 아이돌로부터 문화의 미래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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