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지난 주말 중도 하차를 선언했다. 그는 사퇴 연설에서 “미국을 점잖게(with civility) 이끌 지도자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공화당 경선 1위를 달리는 옛 상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자, 팬덤 정치에 일그러진 미국을 건드린 말이었다. 부통령 자격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왔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과 기념사진을 찍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지각했다”고 회고록에 썼던 그 펜스다.
▷점잖음, 정중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civility)은 펜스가 즐겨 쓰지만, 미국 SNS 정치에선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표현이다. 펜스는 이날 “우리 본성 안의 더 좋은 천사에 호소하는 정치인, 미국의 승리만이 아니라 점잖고 정중하게 이끌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기자”고 했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 미국인에게 외치던 링컨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펜스의 눈에는 갈등 유발형 트럼프가 50%대 지지율로 앞서가는 현실이 남북전쟁 전야처럼 비쳤을지 모르겠다.
▷펜스의 트럼프 비판은 배신자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인디애나주에서 하원의원 12년, 주지사 4년을 지낸 펜스는 2016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뉴욕시 출신으로 여성 편력이 심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 후보로선 그가 필요했다. “아내 캐런 외에는 여성과 일대일로 식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펜스 규칙’을 지킨 그는 잘 알려진 신앙인이자 신중함으로 트럼프의 빈 곳을 채울 인물이었다. 변방의 펜스가 누구 덕분에 전국적 인물이 됐는데 나를 비판하느냐는 것이 트럼프가 심어놓은 배신자 프레임이다.
▷결정적인 것은 2020년 트럼프의 대선 패배 직후 벌어졌다. 트럼프는 “부정선거였고,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며 부통령이자 당연직 상원의장인 펜스에게 의회의 선거 결과 승인을 막으라고 요구했다. 펜스는 거절하면서 “당신이 헌법과 민주주의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이 과정을 특별검사 앞에 진술했다. 반헌법적 요구라면 ‘정중하고도 당당하게’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다. 하지만 펜스는 배신자 덫에 걸려 지지율이 4% 선을 맴돌았다.
▷펜스가 점잖은 리더십을 지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SNS에서 소비되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짧은 동영상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 “바이든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엉터리 주장을 믿는 공화당원이 80%대에 이른다는 몇몇 여론조사는 펜스가 설 자리를 더 좁게 만들었다. 그의 사퇴 소식에 공화당 후보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만이 “정치인들은 매우 불충(disloyal)할 수 있다”고 깎아내렸다. 떠나고 남는 두 후보의 극명한 대비는 옳고 그름이 뒤엉킨 요즘 미국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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