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의학계와 과학계 모두 의사과학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기존 의사들에 대한 연구 지원을 늘리자는 의학계와 과학의전원 등의 설립을 통해 공학 마인드를 갖춘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과학계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부에서는 의사과학자들이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산업을 먼저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KAIST와 포스텍 등 연구중심대학들이 앞다퉈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는 과학의전원은 과연 국내 의과학 수준을 끌어올릴 첨병이 될 수 있을까.》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MD)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박사 학위(PhD)까지 취득한 과학자를 말한다. 현재 교육 시스템에서는 6년간의 의대 교육 과정을 마치고 MD 자격증을 딴 뒤 석·박사 과정에 짧게는 수년을 더 투자해야 한다. 10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의과학 연구에 뛰어들더라도 막상 연구비 부족에 허덕이다가 결국 임상의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게 학계 지적이다.
기초의학 교수는 임상 교수의 약 10% 수준이다. 한희철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부원장(고려대 의대 교수)은 “그동안 크게 티가 나지 않아 정부나 국민들이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지만 기초의학 인력 부족 문제는 필수의료 쪽에서 이슈화하기 전부터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며 “기초의학이 고갈되는 상태까지 왔다”고 했다. 이어 “기초의학이 붕괴되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같이 새로운 질병이 등장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AI 활용하는 의사가 그렇지 않은 의사를 대체한다”
미국, 캐나다, 영국, 스위스 등에서는 한국보다 먼저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미 유의미한 결과도 나오고 있다.
미 하버드대 의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가 협력한 ‘HST(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 미 스탠퍼드대의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인 ‘MSTP(Medical Scientist Training Program)’ 등이 대표적이다.
31일 대전 KAIST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을 기획했거나 이끌고 있는 학자들이 직접 참여해 해외의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성과를 공유했다. 이들은 우선 대학 입시 등의 성적보다는 학구적인 동기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HST를 이끌고 있는 볼프람 괴슬링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왜 의사과학자가 되고 싶은지, 프로그램 지원에 동기가 된 구체적인 연구경험이 있는지를 질의한다. 벽에 ‘분자 구조’를 그려보라는 요청을 건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000∼2013년 MSTP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성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학생들의 동기와 실력, 교육과정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시험을 보게 해 순위에 따라서 선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하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성적이 아닌 과학적 동기를 가졌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선도적인 의사과학자 양성의 영향으로 해외에서는 이미 인공지능(AI) 같은 공학 기술을 접목한 의료 시스템이 활발하게 연구, 적용되고 있다. 이달 초 데버라 마크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를 예측하는 딥러닝 모델 ‘이브스케이프’를 공개했다. 이를 통하면 바이러스가 어떻게 면역 회피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진화하는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마크스 교수는 의학을 공부하고 현재 AI로 단백질 예측 연구를 하는 의사과학자다.
AI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서비스 개발을 진행 중인 구글 헬스를 이끄는 캐런 데살보 구글 최고보건책임자(CHO) 역시 MD 자격증을 가진 의사 출신이다. 구글 헬스케어는 최근 휴대용 초음파장치와 AI를 이용해 의료 시설이 낙후된 나라의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파악하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AI가 의사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AI를 활용하는 의사가 AI를 사용하지 않는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의사과학자 양성방식 놓고 대립 중인 의학계과 과학계
관건은 의사과학자를 어떻게 양성할지에 대한 방법론을 결정하는 일이다.
의학계에서는 “의사과학자도 결국은 의사”라는 데 방점을 둔다. 이 때문에 기존의 의사들이 더 많은 연구성과를 내도록 연구비를 확충하고, 연구 시간을 보장해주는 방안이 우선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연구중심 의대 신설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연구를 포기하는 의사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미국의 2024회계연도 연구개발(R&D) 예산안에 따르면 의약학 연구비를 지원하는 국립보건원(NIH)의 예산은 486억 달러(약 65조6780억 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예산(124억7900만 달러)의 약 4배다. 한 의대 교수는 “미국에 의사과학자가 많은 핵심적인 이유는 의학을 학문으로 보고 연구비를 충분히 지원한다는 점”이라며 “한국도 NIH 같은 의학 연구 지원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찬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서울대 의대 교수) 역시 7월 과학기자대회에서 “연구석좌교수나 신진연구교수 등이 최소한의 진료와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며 연구 예산 및 시간 확충을 강조했다. 의사과학자가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환자 진료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는데, 그럴 경우 정작 병원을 운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핵심 논지다.
과학계는 생각이 다르다. 연구중심대학 신설을 주장하는 과학계에서는 “임상 중심의 기존 커리큘럼으로는 공학 지식이 충분한 의사과학자 양성이 불가능하다”고 일갈한다. 20여 년간 KAIST 의과학대학원을 운영해온 김하일 교수는 “지금까지는 바이오메디컬 분야에 주로 수요가 있었지만 갈수록 공학이 접목된 의료 분야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기존 의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수학이나 물리학 등의 백그라운드가 너무 약하다”고 했다.
KAIST는 과학의전원을 설립할 경우 의사 자격이 없는 일반 학생을 모집해 4년간 의무석사 과정과 추가 4년의 박사 과정을 거치게 할 계획이다. 의무석사 과정에선 기초임상과 공학을, 박사 과정에서는 깊이 있는 과학 및 공학 과정을 가르친다. 박사 과정은 데이터 사이언스, 의공학, 바이오 등 세 가지 트랙으로 나눠 학생이 전문화할 영역을 선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일부 교육은 공대 박사과정생과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구성해 서로 시너지를 내도록 할 것”이라며 “입학 단계부터 공학 관련 교육을 받아야 향후 의학과 공학의 융합 연구가 가능하고 연구 경쟁력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의사과학자가 양성돼도 아직은 산업적 수요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내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보다는 바이오벤처 등에서 개발한 약물 후보 물질을 사오는, 이른바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사과학자의 수요가 적고, 바이오벤처는 자금이 부족해 많은 의사과학자를 채용하기도 어렵다는 설명이다.
의사 출신인 문여정 IMM인베스트먼트 상무는 “의사과학자 양성도 중요하지만 헬스케어 기업이 매출을 낼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거나, 바이오벤처 육성을 위한 모태펀드 마련 등 산업 육성에 필요한 제도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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