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도 아는 산수로 ‘더 내고 덜 받기’ 완수
연금 두고는 서로 비난 않는 日정치권 배워야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괜찮지. 그런데 결혼은 힘든 거야.”
2019년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당시 일본 환경상이 뜬금없이 총리 관저 로비에서 아나운서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하자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했던 말이다. “기후변화 토론은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해야 한다”는 ‘펀쿨섹’ 발언으로 고이즈미 환경상에 대한 관심이 절정일 때다. 아들도 별종이지만 장가가는 아들에게 저런 인사를 건넨 아버지의 정신세계도 대단했다.
‘일본어를 하는 우주인’으로 불렸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재임(2001∼2006년) 시절 ‘깜짝쇼 극장정치’로 유명했다. 복잡한 이슈를 한 단어로 정리하는 ‘원 프레이즈(one phrase)’ 전략이 탁월했다. 정작 자신은 잘 모르는 이슈를 전문가 의견을 듣고 한마디로 요약해 국민에게 던졌다. 당시에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평가받을 성과가 적지 않았다.
일본 연금 개혁이 대표적이다. “저항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다”라며 밀어붙였다. 정치인은 평생 나랏돈으로 연금을 받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오자 “그럼 다 없애버리자”며 국회의원부터 기초의원 연금까지 모조리 폐지했다. 수학과 교수도 풀지 못할 고차방정식은 덮었다. 그 대신 ‘100년 뒤 740조 엔(약 6675조 원)을 지급해야 하는데 480조 엔(약 4330조 원)이 부족하다’는 초등학교 1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뺄셈으로 연금 재정 위기를 설명했다.
한국 국민연금과 유사한 일본 후생연금이 처음 도입된 1942년 보험료율은 6.4%였다. 그때그때 경제 상황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오르기도 내리기도 했다. 그랬다가 고이즈미 전 총리가 연금 개혁을 단행한 2004년부터 2017년까지 13년간 11번에 걸쳐 조금씩 올렸다. 적게는 0.03%만 인상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연금 보험료율 18.3%가 완성됐다. 보험료율은 올리면서 연금 지급액은 6%가량 줄였다.
반발이 클 수밖에 없을 ‘더 걷고 덜 주는’ 연금 개혁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들어올 돈보다 나갈 돈이 많으면 망한다’는 단순한 명제에 국민을 설득할 힘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적어도 연금을 두고는 여야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싸우지 않았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시작한 연금 개혁이 민주당 집권 시절인 2012년 최종 마무리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9% 보험료율로는 연금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일본이 보험료율을 9%에서 10.1%로 높인 게 1980년이니 연금에서는 일본보다 40년 이상 뒤처졌다고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을 도입한 1988년 70.5세였던 한국인 기대수명은 지난해 83.5세가 됐다. 32년 뒤 연금이 고갈된다는 건 우려가 아닌 피할 수 없는 현실인데도 우리는 연금 개혁 숙제를 계속 미뤄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기가 없어도 개혁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정부는 맹탕 수준의 연금 개혁안을 던져 놓고 개혁 논의를 사실상 원점으로 돌렸다. 세계 최고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의 정책이라기엔 너무 한가하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권이 인기 없는 정책인 연금 개혁을 두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행태는 없다. 차라리 고이즈미 전 총리를 불러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었는지 공개 강연이라도 들어봤으면 좋겠다. 연금 개혁 같은 국가 중대사를 풀어낸 극장정치라면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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