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국감에선 김진욱 처장 자리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장차관 수십 명 기소하면 나라 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야 공히 공수처 실적이 부진하단 지적을 쏟아내다 보니 실무진에서 억지 대응 논리를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운국 차장이 직접 작성해 붙인 메모라고 했다. 또 김 처장은 실제로 국감장에서 “공수처가 일을 잘하면 나라가 안 돌아간다”고 했다.
김 처장과 여 차장은 2021년 1월 임명된 공수처 초대 처·차장으로 곧 3년 임기를 마친다. 그런데 사석도 아니고 국회에서 ‘월급은 받지만 일은 안 하겠다’는 논리를 펴는 걸 보고 저런 생각으로 잘도 조직을 운영해 왔구나 싶었다. 같은 논리라면 감사원이 일을 잘하면 정부가 안 돌아가고, 금융감독원이 일을 잘하면 금융권이 마비되니 둘 다 너무 열심히 일하면 안 된다.
연간 2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된 공수처의 역할은 권력을 견제하고 고위공직자 범죄를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출범 후 2년 8개월 동안 직접 기소는 3건, 공소제기 요구는 4건뿐이다. 청구한 체포영장 5건, 구속영장 3건은 모두 기각됐다.
해외 유사기관과 비교해도 부진한 실적이다. 공수처의 롤모델인 홍콩의 염정공서(ICAC)는 2021년 200명을 기소했고,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은 같은 해 165명을 기소했다. 또 그해 두 기관의 기소 사건 유죄판결 비율은 70∼90% 수준이었다. 인구도 적은 홍콩과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더 부패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김 처장은 실적 부진이 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규 조직은 원래 초반에 작게 시작해 성과를 내며 몸집을 키우는 법이다. CPIB는 1960년 설립 직후 인원이 8명뿐이었다. 공수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74명이다.
문제는 사람이다. 신규 조직일수록 역량과 의지가 있는 리더가 기틀을 잡아야 하는데 김 처장과 여 차장 모두 판사 출신으로 수사 경험이 없다. 또 김 처장은 황제 조사, 통신자료 조회 논란 등을 자초했으며 시무식에서 찬송가를 부르다 소리 내 우는 언행 등으로 여러 차례 도마에 올랐다.
3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 보면 국회에서 추천한 초대 처장 후보는 검찰 출신으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 부위원장을 지내던 이건리 변호사와 김 처장, 이렇게 둘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 처장을 택했는데 ‘검찰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선 전 “대한민국 주류를 교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취임 후 일의 본질을 모르는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반복됐다. 법원 행정을 모르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임명해 재판 지연 문제를 심화시켰고, 부동산을 모르는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임명해 집값대란을 자초했다. 수사기관의 장으로 수사 경험이 없는 인물을 임명한 것도 ‘주류 검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 처장은 임기 내내 언론 탓, 검찰 탓을 하며 실적 부진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다 최근에야 “수사가 이렇게 어려운지 이제 알았다”고 주변에 털어놨다고 한다. 그동안 의욕을 보였던 이들은 조직을 떠났고, 공수처는 ‘법조인의 무덤’으로 불리게 됐다.
지금 상태라면 김 처장 임기가 끝나고 수장 공백 사태가 빚어져도 우려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다음 공수처장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인물을 찾아 임명해야 한다. 대놓고 ‘일 안 하고 월급은 받겠다’는 고위공직자를 더 참아줄 국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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