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곳곳에서 “결국 선을 넘었다”는 탄식이 들린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선을 넘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하마스의 총성이 울린 그날부터 상황은 철로 위로 달리는 기차와 같았다. 놀람의 역, 참혹의 역, 충격의 역을 차례로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 불 뿜는 기차를 세울 방법이 없다. 제3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스라엘이나 하마스나 자신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들 각자가 피해자이고, 각자가 분노하고 있고, 중단과 타협은 패배이자 더 큰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피는 피를 부르고, 분노와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른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사정은 우리가 제일 잘 안다. 지난 80년간 겪었고 겪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유는 신을 믿지 않고 청소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탄압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처음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패권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민주정과 과두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전쟁이 됐다.
그냥 전쟁과 이데올로기 전쟁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동족, 동지, 이웃은 일반 전쟁에서 같은 편이 되지만, 이데올로기 정치 투쟁에서는 모두가 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원수처럼 가혹하게 제거하는 적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과격함을 비판했고, 자신이 그 제물이 됐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을 읽어 보면 별로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헛된 노력임을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제일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행동으로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명예를 얻었지만 자기 생명도, 증오와 이기심의 늪으로 빠져들어 타락하고 멸망하는 아테네도 구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도 동료 시민을 화해시키지 못하는데, 이 전쟁의 분노를 누가 제지할 수 있을까. 더 무서운 건 세계로 확산되는 분노와 갈등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대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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