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동기들과 함께 만든 항공우주 동아리 ‘하늘기지’는 당시 저의 전부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영화 ‘탑건(Top Gun)’에 미쳐 있었는데, OST를 흥얼거리며 항공기 모형을 조립하던 기억이 무척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이후 의대에 진학했고, 신경외과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뇌신경 환자를 돌보고 바쁜 일상 속에 살다 보니 아름다운 추억들이 제 기억 속에서 바래갔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36년 만에 개봉한 ‘탑건: 매버릭’을 몇 번이나 본 이후로 식어 있던 제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난달 공군 ‘국민조종사’에 선발되는 행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면접에 합격하고 비행환경 적응 훈련도 통과하면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소망이 현실로 조금씩 가까워져 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지원자들의 사연과 간절함을 듣고 공감하게 되면서 제가 이런 소중한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조종사로 선발됐을 때, 기쁨과 동시에 국민조종사라는 이름이 가진 무거움을 느꼈고, 저에게 있어야 할 간절함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던 D-day를 맞았습니다.
새벽 비행 준비부터 임명식을 마치는 순간까지 가슴을 뛰게 했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훈련기 T-50에 탑승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조종사들의 교신은 영화 OST처럼 들렸습니다. 동해 상공에서 구름 위를 날다가 수직 강하할 때는 극한의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조종석 옆에 걸터앉아 있던 순간, 기분 좋게 불어온 바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뇌종양 전문의입니다. 그중에서도 장시간 고난도의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의사입니다. 모든 수술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뇌종양 수술에 앞서 손을 씻으며 각오를 다집니다. 이런 제 마음은 절대로 질 수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의 마음과 그 결이 같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번 비행을 맘껏 즐길 뿐이었지만, 조종간을 잡으신 천익호 공군 대위는 착륙 후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분께는 이 비행이 전투 같은 것이었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임무였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반드시 환자를 살려야 하는 것인데도 저는 때때로 환자를 잃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를 대지 않고는 저 자신을 지탱해 나가기 어렵습니다. 점점 스스로의 위로에 익숙해지면서 용기를 잃고 지쳐버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민조종사로서 꿈같은 하루를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저는 뜨거웠던 청춘을 다시 기억해내고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패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전투에 나서는 파일럿의 용기 같은 것 말입니다.
국민조종사를 지원하고 준비하면서 저에게 있어야 했던 간절함과 그에 대한 답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지는 저의 각오가 국민조종사로서 대한민국 공군과 관계자분들에게 보내는 저의 감사와 보답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