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순정’ ‘동백아가씨’ ‘섬마을선생님’ ‘기러기 아빠’…. 애절함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대중의 삶과 시대의 애환을 달래준 가수 이미자 씨(82). 올해 데뷔 64주년을 맞은 그가 대중음악인 최초로 지난달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금관문화훈장은 정부의 문화훈장 중 가장 등급이 높다.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그는 ‘작은 거인’이다. 대중가수에겐 허가되지 않던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1989년 당시 고건 서울시장과 직접 면담해 성사시켰고, 2002년 남한 가수 최초로 북한에서 단독 공연을 했다. 1965년부터 5년간 베트남전쟁 파병 국군을 위한 위문공연에 참여했다.
여든을 넘어서도 풍부한 성량과 변함없는 목소리로 관객과 호흡하는 그를 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에서 만났다. 특유의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에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는 소녀 같았다. 》
―대중가수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이 어떤가요.
“2009년 가수로선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데 이어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았습니다. 더없는 영광이고 행운이죠. 60년 넘게 저를 좋아해주신 팬들이 안 계셨다면 받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애쓴다고 다 사랑받을 순 없잖아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가수로 오랜 길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데뷔해 ‘동백아가씨’로 사랑받았을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베트남전쟁으로 파병을 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독일 중동 등 외국도 마다하지 않고 나가셨죠. 그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다고 믿어요. 힘겨운 삶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제 노래로 달랬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란 젊은 세대도 자연스럽게 저를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도 라이브 공연을 하십니다.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특별한 관리는 안 해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1시쯤 자요. 음식은 나물 등 채소 위주로 먹어요. 튀긴 거나 단 건 안 좋아해요. 커피는 하루 딱 한 잔만 마시고요. 군것질은 안 합니다. 따로 운동하지 않는데 60년 넘게 몸무게 48∼50kg을 유지하며 목 컨디션도 지킬 수 있는 건 이렇게 지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이 셋(딸 둘, 아들 하나)을 키운 것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만들었고요.”
―바쁜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집안 대소사를 직접 챙기셨습니다.
“경남 창녕 광산 김씨 종가의 맏며느리예요. 우리 시대엔 내가 바쁘더라도 맏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도리를 해야 한다 여겼고, 가슴에 늘 참을 인(忍)자를 새기며 살았어요. 음식은 다 제 손으로 했고요. 저도 힘들었지만, 남편 역시 ‘이미자의 남편’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어요. 그게 지금도 미안해요.”(그의 남편은 KBS 제작지원국장을 지낸 김창수 씨다.)
―1965년 베트남전쟁 파병 국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당시 사고로 이마와 왼쪽 볼에 흉터가 생겼지만 성형수술을 안 하셨습니다.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 수술은 생각도 안 했어요. 사진 찍을 때 흉터가 있는 왼쪽은 잘 안 보이게 하려 해요. 성형을 하면 자연스럽지 않아요. 피부 시술도 마찬가지고요. 있는 그대로, 나이 드는 모습 그대로를 지키자는 게 제 주관이에요.”
―베트남전쟁 당시 위문공연 무대에 다섯 번이나 섰습니다. 2002년엔 남한 가수 사상 첫 평양 단독 공연을 하는 등 기록이 참 많습니다.
“남북한 가수 통틀어 북한과 남한 방송에서 동시에 단독으로 콘서트를 중계한 건 처음이었어요. 기념비적이었죠. 공연 전날 긴장해서 잠을 거의 못 잔 기억이 나요. 베트남전쟁 파병 위문공연 출연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결정하셨어요. 청와대 비서관이 공연단 단장이었고, 김포에서 출발해 홍콩을 들러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에 들어갔죠. 이후 5년간 매년 월남 위문공연 무대에 올랐어요.”
―대중가수에게 벽이 높았던 세종문화회관 공연 성사를 위해 서울시장을 찾아가 담판 지을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1989년은 데뷔 30주년인 해였어요. 제 대표곡 중 하나인 ‘동백아가씨’가 2년 전인 1987년에 해금됐고요. 22년 만이었죠. 30주년 무대에서 맘껏 부를 수 있었기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꼭 하고 싶었어요. 당시 세종문화회관에 대관 신청을 했는데 ‘이미자 공연을 하면 명예의 전당이 고무신짝들의 판으로 전락한다’며 거절했다더라고요. 그게 너무 가슴에 맺혔어요.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지인의 주선으로 고건 시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어요. 결국 그해 10월 16∼18일 공연 허락을 받아냈죠.”
―당시 여야 4당 총재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제가 당시 여야 4당 총재들을 당사로 찾아가 초대했어요. 민정당에선 박준규 대표가 오셨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총재 내외분도 모두 오셨죠. 당시 김대중 총재께선 공연 날짜인 1989년 10월 16일을 적어 휘호를 써주셨어요. 공연 끝난 뒤 액자에 넣어 집으로 보내주시기까지 했죠.” ―또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요.
“2013년 근로자 파독 50주년을 맞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을 했어요. 당시 파독 광부였던 분들이 제게 ‘갱도 안에 작은 카세트 하나 들고 내려가 벽에 붙여놓고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곡괭이질을 했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너무 뭉클했죠. 폐광이 된 갱도에 직접 들어가서 현장도 봤습니다. 제 노래가 그분들에게 위로가 됐다는 말에 제가 더 감사했어요.”
―콘서트에서 앙코르 곡까지 27곡가량을 모두 라이브로 부르십니다. 힘들진 않나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진 힘들어 죽겠는데도, 희한하게 무대에 ‘신’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제 관객들은 대부분 70, 80대이고 젊은 분들이 50, 60대세요. 그분들이 제 무대를 보겠다고 먼 길을 고생해서 오시는데 이분들 반응이 거의 아이돌 팬덤 수준이에요. 열기가 어마어마해요. 그분들의 기를 받아서 그런지 힘이 나요. 무대에 설 때마다 신이 제게 ‘너는 태어나서 평생 가수로 살 팔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내년이 데뷔 65주년입니다. 기념 공연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은 없어요. 저는 악단 밴드 라이브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사람이에요. 완전 아날로그죠. 그래야 순수한 음악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콘서트를 하게 된다면 악단 연주가 가능한 공연장이어야 해요. 65주년 공연보다 더 하고 싶은 공연이 있긴 해요. 196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우리 국민 10만여 명이 봉제일을 하러 갔어요. 현지에 남은 분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여는 게 저의 남은 숙제예요.”
―후배 가수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각 시대를 대변하는 것 중 하나가 대중가요라고 생각해요. 시대별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있죠. 요즘 가수들은 가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워요. 가끔은 자막을 보지 않으면 우리말인데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고요. 슬픈 가사인데 웃으며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정석으로 노래 부르는 가수들이 전통가요의 맥을 지켜나갔으면 좋겠어요.”
―은퇴 시기를 생각한 적이 있는지요.
“은퇴 생각은 없어요. 관객이 나를 찾지 않으면 그게 은퇴죠. 저는 단정해 결정 내리는 것을 안 좋아해요. 그래서 은퇴 시기를 못 박지 않죠. 관객이 저를 찾는 한 무대에 서고 싶어요.”
이미자 약력
△1941년 서울 출생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 △1965년 베트남전 파병 국군 위한 첫 위문공연 △1967년 무궁화훈장 수훈 △1973년 베트남 최고 문화훈장 수훈 △1989년 대중 가수 최초 세종문화회관 단독 공연 △2002년 남한 가수 최초 평양 단독 공연 △2009년 대중 가수 최초 은관문화훈장 수훈 △2023년 대중 가수 최초 금관문화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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