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시작된 양측의 전쟁은 심각한 인도적 위기와 함께 전 세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시민권을 모두 가진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사람이 실제 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우리나라의 음악팬들은 지난해 그를 11년 만에 만날 뻔했다. 바렌보임은 30년 동안 이끌어 온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처음으로 이끌고 내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직전인 10월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와 그 밖의 활동을 줄이겠다고 발표했고, 독일 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대신 서울에 왔다. 바렌보임은 올해 1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운터 덴 린덴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바렌보임은 1942년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가족은 신생 국가인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7년 6월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6일 전쟁이 터지자 바렌보임은 약혼녀인 영국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와 이스라엘에 들어가 최전선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닷새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뒤프레는 유대교로 개종했고, 바렌보임의 친구인 인도인 지휘자 주빈 메타가 ‘모셰 코헨’이라는 유대식 이름으로 증인을 섰다.
1999년 바렌보임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사회평론가이자 문학평론가, 음악평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와 함께 ‘서동시집(西東詩集·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기타 아랍 국가들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화음을 맞추며 서로간의 이해를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이 오케스트라는 2011년 한국의 임진각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창설된 1999년은 바렌보임이 팔레스타인인의 땅에서 처음 연주한 해이기도 했다. 2008년 1월, 서안지구의 라말라에서 공연한 뒤 바렌보임은 팔레스타인 시민권을 취득했다. 2011년 5월에는 유엔과 협의 후 여러 나라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자지구에 ‘조용히’ 들어가 모차르트의 작품을 지휘했다. 이 콘서트에서 바렌보임은 “팔레스타인의 정의는 폭력 없이 달성될 경우에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폭력은 팔레스타인인의 정의를 약화시킬 뿐입니다”라고 말해 갈채를 받았다.
그가 주장하는 평화의 길은 ‘두 국가 방안’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미래가 그들의 주권 국가에서 보장될 때 이스라엘의 안보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라고 말해 왔다.
건강 악화로 힘든 상황이지만 바렌보임은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마스의 전면 기습공격 직후 그는 X(트위터의 후신)를 통해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은 터무니없는 범죄로 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대해서는 “이런 일은 ‘집단처벌’ 정책이자 인권 침해”라고 제동을 걸었다.
지난달 15일 그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보장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희망과 정의를 느낄 수 있을 때 이스라엘인들이 안전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바렌보임의 결혼식에서 증인을 선 메타의 말도 들어보고 싶다. 1969년부터 2019년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과 음악고문을 지내며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 같은 인도인’으로 불렸던 그도 요즘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 지난달에는 사망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번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메타는 2016년 80세 생일을 맞아 이스라엘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고립돼 있다. 성경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고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며 이스라엘 보수 강경 정부의 정책에 우려를 표시했다.
두 베테랑 지휘자는 이제 삶의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황혼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전 세계 단위의 무력 충돌은 없었던 시대의 황혼과 겹쳐지기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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