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관석]소록도 성자가 남긴 울림… 尹 행보도 감동이 있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14일 23시 42분


장관석 정치부 차장
장관석 정치부 차장
어느 부고가 가벼운 게 있겠느냐만은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오스트리아 간호사의 선종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43년간 소록도에 머물며 한센인들을 돌본 삶 자체가 성자적 울림을 역설하고 있다. 소록도(小鹿島). 하늘에서 바라본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과 달리 ‘천형의 땅’으로도 불렸다. 한센인의 강제 격리 수용 공간인 이곳은 차별과 기피의 알레고리이자 ‘국가 폭력’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일찍이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형상화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소록도 병원을 찾았고, 낙토 건설에 삶을 불태우고 있던 조창원 원장(소설 속 조백헌의 실제 인물)을 그려냈다. 훗날 그는 조백헌의 순교적 삶이 자기도취의 독선적 낙원으로 치닫게 될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이청준 ‘야윈 젖가슴’ 중). 조 원장은 훗날에도 성자적 실천을 지향했고, 이로써 소설 속 꿈이 현실이 써내려간 속편에서 성취되는 울림을 남겼다. 그다음 속편을 써내려가는 건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부고 소식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달 1일 바로 나온 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고귀했던 헌신의 삶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기원한다”고 적었다. 반면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에선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차별과 무지가 배태한 인권침해, 강제낙태와 단종수술. 발전 담론 속에 자유에 대한 철저한 억압의 공간에서 평생을 희생한 이 파란 눈의 성자들에게 예우를 표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본다.

한 달여가 지나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을 찾은 건 윤 대통령이 아닌 김건희 여사였다. 김 여사는 한센병뿐만 아니라 고혈압, 기력 저하 등 기저질환을 함께 앓는 환자들 손을 맞잡았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의 생활상을 간직하고 있는 ‘M 치료실’을 찾아 헌화했다.

조용한 내조에 충실하겠다던 김 여사의 대외 활동은 찬반이 갈리는 논쟁적 이슈이지만 요즘 대통령 일정보다 김 여사 행보가 대승적이고 약자 지향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의 국내 행보가 철저히 민생 중심으로 짜인다고 하지만 ‘새마을운동’ ‘박정희’ ‘대구경북’ 등 보수주의적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는 탓일 것이다.

그런 탓에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적 생동감과 통합에의 지향을 발산하던 모습보다 정형화된 틀에 갇히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 여의도에 빚이 없던 그의 ‘자산’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몇 시간을 할애해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았고 김영삼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도 찾았다. “민주당의 양식 있고 훌륭한 정치인들과 합리적이고 멋진 협치를 하겠다”고 공언하던 그다. 이를 가로막는 원인을 찾는 게 국정 해법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 대통령이 올 4월 대구 삼성라이온즈 파크에서 프로야구 개막경기 시구에 나선 건 성공적인 일정 기획의 사례로 대통령실에서 평가됐다. 김 여사가 소록도를 찾아 성자들을 조문한 일정은 그 못지않은 장면이라 본다. 윤 대통령 일정에도 연설에도 울림이 필요하다.

#성자#울림#윤 대통령#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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