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서 시작해 사퇴·해임으로 끝난 사장들
“신뢰 회복” 못 하면 ‘수신료 회초리’ 맞을 것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정중히 사과한다”며 배석한 간부들과 10초 넘게 고개를 숙였다. 진행자가 “KBS 임원진들의 사과 기자회견은 KBS 역사상 처음인 듯하다”며 의미 부여를 했지만 감동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다. 박 사장이 “불공정 편파 보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사례로 든 윤지오 출연, 검언유착 오보, 생태탕 집중 보도, 김만배 녹취록 인용 보도 모두 전임 사장 시절 있었던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과오를 반성하는 건 KBS의 관례인 듯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에서 “KBS는 지난 몇 년간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며 “KBS 제작자와 진행자들은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의 중요성을 깊이 가슴에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양승동 사장은 보수 정부 시절 KBS 방송을 “10년의 실패”로 규정하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좌우 가리지 않고 줄곧 어용 방송을 해왔다는 ‘자백’으로 들린다.
반성 후엔 모두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했지만 사장들 스스로가 거듭나지 못하고 끝이 안 좋았던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1987년 민주화 성과로 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KBS 이사회가 신설돼 사장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당이 사장을 내려보내는 흑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1988년 취임한 서영훈 사장은 “KBS 최초의 민선 사장”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KBS의 역대 ‘민선’ 사장 13명 가운데 법정 3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이명박 정부의 김인규 사장과 문 정부의 양 사장 둘뿐이다. 두 사람은 정권이 바뀌기 전 임기가 끝나는 덕을 봤다.
홍두표, 박권상 사장은 연임 후 정권이 교체되자 사퇴했고, 2명은 정권교체 전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마치고 물러났으며, 나머지는 초대 민선 사장을 포함해 대부분 권력과 갈등하다 사퇴하거나 해임됐다. 박민 사장도 문 정부에서 임명된 김의철 사장이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대규모 적자와 편향 방송 등을 이유로 해임된 후 임명된 경우다.
사장이 이 지경이니 회사가 거듭날 수 있겠나. KBS는 박민 사장의 표현대로 “미증유의 위기” “절체절명의 생존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연간 6000억∼7000억 원의 수신료를 보장받으면서도 시청점유율은 급감 중이고, “뉴스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예능과 드라마의 경쟁력 또한 저하됐다”는 평가와 함께 2017년과 2020년 정부의 재허가 심사에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KBS를 보기 위해 시청자들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고 금액(Willingness to Pay)은 계속 줄어들어 2019년엔 현행 수신료인 월 2500원도 안 되는 1667원까지 떨어졌고, 올 7월 수신료 분리징수제가 시행되자 수신료 수입이 두 달간 56억9000만 원 줄었다. ‘신뢰의 위기’를 이만큼 명료하게 보여주는 숫자도 없을 것이다.
박민 사장은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회초리를 맞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는데 진짜 각오해야 한다. 그는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이후 첫 KBS 수장이다. 이제는 시청자들의 신뢰도가 수신료 수입으로 나타난다. 사장 바뀐 뒤로도 9시 뉴스가 ‘땡윤 뉴스’가 됐을 뿐 무보직 고연봉의 ‘기둥 뒤 직원들’은 그대로라면 수신료 납부 거부 사태가 일어나 사장부터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정치적) 외풍을 막고 파괴적 혁신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수신료가 아깝지 않다”는 시청자들의 신뢰가 KBS와 박민 사장을 ‘외풍’에서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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