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회는 평소엔 자기들 싸움하다가 나중에 법안을 몰아서 왕창 통과시키잖아요. 한 번에 50개 통과는 예사고…. 오죽하면 일본에서 한국은 어떻게 그렇게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느냐며 벤치마킹하러 오겠어요.”
최근 만난 한 재계 인사는 대한민국 국회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한탄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표심 잡기에만 골몰했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혁신산업을 키울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자르거나 제거하는 ‘유전자가위’ 기술을 사용한 치료제나 종자 개발을 위한 법안이 대표적이다. 영국 정부가 16일(현지 시간)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한 질병 치료법을 승인하는 등 각국은 바이오 혁명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상용화 자체가 사실상 막혀 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유전자교정 식품에 유해성 심사 등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법안(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년 넘게 국회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
유전자가위 작물은 유전자변형식품(GMO)과 구조적으로 다른데도 국내에선 GMO로 간주되는 등 시민단체 반대가 거센 영향이 크다. 국회 상임위에서 야당 의원이 관련 부처에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입장을 모두 적어서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끝난 뒤 관련 논의가 끊겼다. 법안이 잠자는 사이 ‘갈변되지 않는 감자’를 개발해 미국에서 GMO 규제 면제 승인을 받은 툴젠, 돼지 신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해 221일간 생존시킨 옵티팜 등 국내 유전자가위 기업들은 손발이 묶이게 됐다.
공유차가 공영주차장에 차고지(주차장)를 둘 수 있도록 하는 주차법 개정안은 쏘카 등 특정 업체에 특혜를 준다는 이유로 국회에 1년 넘게 계류되어 있다. 미국 호주 등 각국이 도심 교통난 완화와 탄소 배출 억제 등을 위해 모바일 스트리밍(mobile streaming·차를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쓰는 것) 활성화 차원에서 공유차 주차장을 지원하는 글로벌 추세와도 역행한다.
로블록스나 제페토 등 급성장한 메타버스 산업을 키우기 위한 메타버스 진흥법 제정안도 마찬가지다. 관련 법안이 마련됐지만, 정작 국회 상임위에선 메타버스 산업을 어떻게 키울지보다는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미국 특정 업체가 최초로 썼는데 이를 보통명사화할 수 없는지, 법안명을 가상융합산업법으로 바꿀 순 없는지, 이 경우 메타버스 자산이 가상자산처럼 되지 않을지 등 본질과 겉도는 논의만 오가다 끝나 버렸다.
정부가 킬러 규제 혁파를 아무리 외쳐도 그 시작 단계인 국회에서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산업 혁신을 위한 국회 노력은 낙제점에 가깝다. 동아일보가 규제 개혁 혁신 법안 146개를 분석한 결과 단 6개 법안만 국회를 통과했다. 국무총리실이 별도 관리하는 법안인데도 이렇다. 총선을 앞두고 경기 김포시를 서울로 편입시켜 주겠다느니, 재건축이 지지부진한 신도시 정비사업을 빨리 하게 해주겠다느니 유권자 표심을 당장 얻을 수 있는 개발 공약을 여야가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 고착화되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혁신산업 규제 완화가 절실한데 국회가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규제 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국회의원이 규제 완화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를 넘어섰다. 각국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기업 유치에 혈안인데 우리는 반대로 기업들을 내몰고 있다. 21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다음 달 9일까지로 보름 남짓 남았다. 일하는 방식을 확 바꾼 국회를 이제라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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