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비엔날레 전시장 독일관에 백남준(1932∼2006)은 설치 작품 ‘시스틴 채플’을 선보입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나무 선반 위에 브라운관(CRT) 프로젝터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빈 벽과 천장으로 영상이 가득 메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CRT 프로젝터를 들고 선반 위 높은 곳에서 수일간 씨름하던 설치 스태프들이 지치자, 백남준은 이들의 숙소로 찾아가 조식에 달걀 하나씩을 추가 주문해줬다고 전해집니다.
어렵게 선보인 이 작품은 2022년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지금은 서울문화재단 기획전 ‘언폴드엑스’전이 열리는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시된 이 작품의 형태는 사뭇 다릅니다.
백남준의 ‘현대판 시스틴 채플’
먼저 1993년 ‘시스틴 채플’은 백남준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독일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면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백남준이 첫 개인전을 연 곳이 바로 독일이었고,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87)와 공동으로 독일관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백남준은 이곳에서 세계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스틴 채플’을 미디어 아트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린 시스틴 채플이 종교와 신화로 가득했다면, 백남준은 동시대 예술가와 팝스타로 전시장의 벽면과 천장을 채웁니다.
영상 속에는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샬럿 무어먼 등 동료 예술가는 물론이고 데이비드 보위, 재니스 조플린, 사카모토 류이치까지 등장합니다. 게다가 매우 빠른 영상 전환과 시끄러운 음악은 정적인 시스틴 채플과는 완전히 반대였죠. 미디어로 발달한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백남준식 ‘현대판 시스틴 채플’이었습니다.
나무는 철제로, CRT는 LCD로
이번 문화역서울284에서 전시작의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의 외형이 1993년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선 1993년에 CRT 방식이었던 빔프로젝터는 액정표시장치(LCD) 빔프로젝터로 교체되었습니다. 또 이 프로젝터를 올렸던 나무 선반은 철제 비계가 되었죠.
영상과 음악의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작동하는 기계의 외관은 다릅니다. 이는 미디어 아트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지금의 형태는 어떻게 결정된 걸까. 출발은 2019년 영국 테이트 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백남준 회고전이었습니다. 이 전시 기획자들은 1993년 ‘시스틴 채플’을 설치했던 엔지니어, 백남준 에스테이트 관계자와 협의해 지금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우선 CRT 빔프로젝터는 더 이상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수리 기술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LCD를 선택했고, 구조물도 전시 공간에 맞춰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기술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 인간
테이트 모던 전시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는 “백남준에게는 그것을 송출하는 기기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백남준은 생전 LCD 기술이 발전하자 CRT 대신 이 기술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라바글리아의 분석은 백남준 예술 세계의 맥락에 비춰 봐도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을 해체·활용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남준 작품에는 텔레비전에 자석을 붙여 영상을 일그러뜨리고, 브라운관을 떼어내고 그 안에 촛불을 켜놓은 것도 있죠. 여기서 백남준은 텔레비전 같은 기술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지 말고,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주체가 되라고 주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CRT냐 LCD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떤 모양인지를 따지는 것 같습니다. 즉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기술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결국은 그것과 얽히게 되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메시지였다는 것이지요.
다만 미디어 아트 역시 시각 예술이기에 남는 고민은 있습니다. 어떤 조각 작품들은 브라운관이 주는 특유의 형태를 존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또 CRT 영상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LCD에서는 너무 선명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면 큐레이터는 전 세계에 몇 명뿐인 CRT 기술자를 수소문하거나, 전국의 고물상을 뒤져 브라운관 모니터를 구해야 합니다. 테이트 모던에서도 CRT 모니터를 구하려 온라인 오픈마켓인 이베이까지 샅샅이 찾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회화가 가장 간단하고 훌륭한 미디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디오 기술은 지금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생겨난 지 100여 년이 지났을 뿐이고, 계속해서 그 방식이 바뀌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백남준의 어떤 작품들은 ‘다다익선’처럼 매번 어떻게 유지해야 하느냐란 문제에 자주 부딪힙니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여러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엔지니어들이 백남준의 작품을 각기 다르게 해석해 여러 가지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시스틴 채플’의 여러 버전을 찾아보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지 비교해 보세요. ‘언폴드엑스’전은 12월 13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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