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지금 나를 가장 기쁘게 할 ‘거리’를 고민한다. 무료한 일상에 대한 처방으로, 소소한 성취에 대한 포상으로, 때론 그저 기대가 주는 위안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을 기준으로는 언니, 동생과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나의 티케팅을 가로막는 것은 서로의 사정이지 최소 ‘돈’은 아니다. 일정만 맞출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날아가 맛있는 삼시 세끼쯤은 먹을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발을 디딘 지 11년이 지났다. 이삼십 년은 거뜬한 선배님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분사, M&A 등 피용인으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들을 겪어오며 어느덧 네 번째 일터에 재직 중이다. 투자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다지 ‘돈’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다. ‘돈은 따라오는 것이지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말로 무관심을 정당화했고, 연봉 계약 때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쉽게 쉽게 사인하곤 했다. 다행히 그 어리석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안일했던 믿음의 대가로 밥그릇 챙기는 법을 배웠다.
마흔을 예습하며 여실히 깨닫는 점.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야 알 수 있는 행복도, 피할 수 있는 불행도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돈이 제공하는 기회와 경험, 심지어는 매개할 수 있는 마음까지, 그 편의를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단어 ‘낭만’ ‘취향’ ‘배려’는 특히 값이 비싸다.
내일 훌쩍 떠나려면 비싼 티켓을 감수해야 하고, 목 좋은 곳에서 혼술이라도 하려면 2인분은 너끈히 시켜줘야 환대받을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좋아하지만, 때론 5성급 호텔의 안락함도 무리 없이 즐기고 싶고, 떡볶이와 소주만큼 오마카세와 위스키도 좋다는 것을 경험치로 안다. 그뿐인가. 때로는 열 번의 말보다 한 번의 선물이 더 분명하게 마음을 전한다. 단 한 번도 ‘내가 계산할게’ 나서지 않는 상대에 대한 서운함, 생각보다 많은 축의금을 보내온 이에 대한 고마움은 명백히 관계를 재정립한다.
연봉이 곧 나의 ‘존재 가치’는 아니지만, 연봉이 증명하는 나의 ‘시장 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 실재한다. 냉혹하지만 그것은 곧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경험, 어쩌면 누리게 될 행복의 종류를 경계 짓는 숫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많이 벌고 싶다. 다시 말해, 많은 종류의 행복을 직접 경험하고 내게 맞는 것을 ‘가능’ 여부가 아닌 ‘의지’로 선택하고 싶다. 정도의 차이일 뿐 마냥 초연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돈, 혹은 ‘욕망’이라면,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위로나 긍정으로의 도피가 아닌 ‘대책’이다. 단편적 ‘힐링’은 휘발성이 강하다. 성장도 대우도 불만족스러운 일터에서의 무기력한 퇴근길, 맛있는 반주 끝에 새 이력서가 있어야 하는 이유, 쉽게 쉽게 사인하던 연봉 계약서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불행은 마음을 고치는 것만으론 해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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