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은(銀), 살구 행(杏)’ 은행은 열매처럼 보이지만 씨앗의 일부가 변형된 종자다. 크게 3개 껍질층으로 돼 있는데, 가장 바깥에 물렁물렁하고 과육처럼 보이는 겉껍질, 안쪽에 희고 단단한 중간 껍질, 얇은 갈색을 띠는 속껍질이다. 이 속껍질을 벗겨내면 비로소 우리가 먹는 연한 노란색의 조직, 배젖이 나온다.
한의학에서 은행은 백과(白果)라고 해서 오래 약재로 써 왔다. 은행의 효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정천지해(定喘止咳)라는 효능이 있다. 천식을 다스리고 기침을 멈춘다는 뜻이다. 은행 속의 펙틴, 히스티딘 같은 성분들이 면역력을 높이면서 진해거담 작용을 한다. 둘째, 은행은 방광의 수축이완 작용을 조절해 야뇨증과 요실금을 다스릴 수 있다. 옛날에는 이불에 쉬하는 아이들에게 은행 열매를 볶아 주었다. 셋째, 여성의 경우 분비물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대하증이 있을 때 좋다.
은행잎 추출물은 혈액순환 개선제로 활용된다. 은행잎에 있는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혈행과 뇌 혈류를 개선한다. 은행 속 징코라이드 성분은 콜레스테롤 및 혈전 제거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수술 전에는 수술 후 출혈이 멎지 않을 것을 대비해 은행잎 추출물 약이나 영양제 복용을 피한다. 은행잎에 있는 레시틴 성분은 칼슘 흡수를 돕는다.
하지만 은행 종자에는 MPN(메티오피리독신)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다. 체내에서 비타민 B6 대사를 방해하고 위장관과 신경계에서 중독 증상을 일으켜 구토, 설사, 간질 발작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독성 물질은 겉껍질과 속껍질에도 다 있어 은행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한다. 은행 독은 열에 강해 굽거나 삶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은행 손질 과정에서도 사고가 생길 수 있다. 2021년 가톨릭대 안과 논문에 따르면 81세, 73세 여성이 내원했는데 눈에 염증이 심했다. 바이러스 감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 은행을 다량 손질한 뒤 그 손으로 눈을 비벼서 염증이 난 것이었다. 안독성뿐 아니라 전신 부종이나 심한 관절염을 보였다는 보고도 있어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은행을 손질할 때는 반드시 고무장갑을 끼고 해야 한다. 길에 떨어진 은행은 만지지 말아야 한다.
껍질을 다 깐 배젖 상태로 먹더라도 너무 많이 먹으면 병원에 실려 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식약처는 성인 하루 10알 미만, 어린이는 2∼3알 이내로 섭취량을 제한하고 있다. 사람마다 독성 반응에 이르는 함량이 다를 수 있어 노약자라면 가급적 은행을 먹지 말고, 건강한 성인도 하루 10알씩 꾸준히 먹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
은행잎에는 MPN이 없다. 그러나 접촉성 피부염과 알레르기 피부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은행산이 함유돼 있다. 만약 은행잎을 구해 집에서 차를 끓여 마신다면 주의해야 한다.
정세연 한의학 박사는 음식으로 치료하는 ‘식치합시다 정세연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유튜브 ‘정라레 채널’을 통해 각종 음식의 효능을 소개하고 있다. 11월 기준 채널 구독자 수는 약 87만70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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