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야반도주했잖아요. 그때는 사직서도 마음대로 못 썼어요.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걸로 알았으니까(웃음).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밤에 상사 책상에 사직서를 올려 놓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꿈틀꿈틀 뭔가가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는 그렇게 ‘제주 사람’이 됐다. 서귀포시 인덕면 산방로에 사무실이 있는 재주상회에서는 오직 제주 콘텐츠로만 책 전체를 꾸리는 잡지 ‘iiin’도 발행하는데 나는 이 간행물의 오랜 팬이다. 특히 할망들이 나와 이런저런 인생 조언들을 날리는 인터뷰 칼럼. 훈훈하고 재미있어서 하하 웃으며 페이지 귀퉁이를 접은 적도 여러 번이다.
지난 호에 나온 강순자 해녀 할망이 한 말은 이랬다. “일을 한다는 건 너무 좋은 거. 일하믄 돈도 벌고 물질하는 친구 만나 수다 떨고. 그게 막 재밌어. 그러니까 밥 먹다가도 수저 내려놓고 따라 나가는 거.” 그간 수많은 할망의 얘기를 읽었는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은 본 적이 없다. 깊게 파인 주름 위로 웃음이 한가득이고 거기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미덥고 긍정적인 것들. 나도 따라서 힘이 난다. 고 대표도 마찬가지인지 몇 년째 신나게 일한다. 제주 김밥 투어부터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까지 제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콘텐츠의 믿음직한 관제탑이자 발신기지가 되고 있다.
후배 명연이는 몇 년 전부터 제주에 살고 있다. 그녀가 살아내는 삶의 무대는 나보다 몇 배는 큰 것 같다. 사진 찍는 남편과 호주 태즈메이니아로, 아이슬란드로 훌쩍 여행을 떠나 캠핑 하고, 빙하 트레킹하며 새로운 것들을 해 보는 식이다. 이 부부가 제주도 이주를 결심한 건 곽지 해수욕장 덕분. 아늑하고 이국적인 풍경,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에 취한 이들은 어느 날 ‘그래, 제주도에서 살자’ 하고 조용히 마음을 먹었다. 몇 달 전 만난 명연은 행복해 보였다. 당연히 먹고사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큰 문제 없다고. 제주도의 하늘길이 매일 열리듯 살다 보면 계속 새로운 일과 길이 열린다고. 나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지난주에는 제주도에서 중식당을 하는 부부를 만났다. 영국 런던 세인트마틴 스쿨에서 만난 한국인 아내와 중국인 남편은 어느 날 본인들이 패션보다 음식에 더 애정이 많은 것을 알고 이곳 제주도에 로아앤메이라는 중국 후난성 가정식 요리 전문식당을 차렸다. 슬슬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 이곳은 ‘동쪽의 보석’이라는 애칭이 붙일 만큼 귀한 식당이 되었다. 지친 어느 날, 그곳으로 가 볼까? 떠올릴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3년 전, 제주도로 떠난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행복하고 싶어 제주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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