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문병기]스머프와 MMA, 그리고 팔꿈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6일 23시 45분


막말-폭력을 되레 자랑하는 美 의원들
진영 정치 악순환에 빠져든 민주주의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장면1. “넌 꼭 스머프 같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가짜뉴스나 토해내고 다니는….”

미국 공화당 소속 제임스 코머 하원 감독위원장은 감독위원회 청문회에서 민주당 재러드 모스코위츠 의원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코머 위원장이 ‘세금을 줄이려고 유령 회사를 두고 동생에게 대출을 내줬다’는 자신에 대한 의혹을 언급한 모스코위츠 의원에게 조롱으로 맞선 것이다. 모스코위츠 의원은 이날 하늘색 양복과 넥타이 차림이었다. 코머 위원장은 “유령 회사라는 건 헛소리”라며 “너는 재정적인 문맹”이라고 육두문자를 섞은 막말을 이어갔다.

#장면2. “입을 더 놀리고 싶어? 이 자리에서 끝장내는 건 어때.”

미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 청문회. 공화당 마크웨인 멀린 의원은 증인으로 나온 숀 오브라이언 운전자노조위원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 올린 자신을 비판하는 글을 읽으며 이같이 말했다. 멀린 의원은 전적 5전 5승의 종합격투기(MMA) 선수 출신. 오브라이언 위원장이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맞받아치자 멀린 의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문회장이 격투장으로 돌변하기 직전 버니 샌더스 위원장은 “상원의원답게 행동하라”고 멀린 의원을 다급히 제지했다.

#장면3. “이봐 케빈! 내 등을 팔꿈치로 때린 거야?”

공화당 팀 버쳇 하원의원은 미 공영라디오(NPR) 기자와 인터뷰하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등 뒤로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인터뷰를 중단하고 추격전에 나선 그는 매카시 전 의장을 향해 “팔꿈치가 내 신장을 정확히 가격했다”며 “겁쟁이 같은 인간” “치사하고 한심한 인간” 같은 욕설을 퍼부었다.

정치 풍자 코미디쇼에서나 나올 법한 이 사건들은 미 의회에서 14일(현지 시간) 하루에 벌어진 일이다.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을 막기 위한 임시예산안을 두고 긴장이 고조되던 때 동시다발로 터진 사건들을 두고 미국에선 ‘도대체 미국 민주주의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라는 탄식이 쏟아졌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오히려 당당하다. 상대 당 의원 외모와 옷차림을 조롱한 코머 위원장은 막말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지지자들에게 ‘스머프 발언’을 알리는 e메일을 보내 선거자금 기부를 독려했다. 청문회장에서 증인과 맞짱을 뜨려 한 멀린 의원은 “과거에는 의원들끼리 권총 결투도 벌였다”며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결투 신청 영상을 자랑스럽게 올려뒀다. 버쳇 의원은 매카시 전 의장 축출을 주도한 맷 게이츠 의원을 비롯한 공화당 강경파들과 매카시 전 의장 징계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부상이 미국 정치 인센티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우려한다. 막말과 폭력으로 강성 지지층 눈에 띄어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선거자금을 긁어모아 정치적 생명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미국 민주주의가 이미 쇠퇴의 악순환에 접어들었다고 걱정한다. 미 의회에선 막장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이달에만 이미 하원의원 12명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런 빈자리는 인종과 학력은 물론 성(性) 정체성까지 위조하고도 1년 가까이 의원직을 지킨 조지 산토스 의원(뉴욕·공화) 같은 이들이 차지한다.

이 때문에 막말과 폭력이 국가 민주주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모리츠 슈몰 영국 런던정경대 연구원 등은 1980∼2018년 80여 개국 의회에서 폭력 사태를 연구한 결과 정치적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퇴보한 국가의 정치 폭력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설치는 암컷’ 발언과 이를 두둔하는 정치인들을 봐도 영 틀린 얘기는 아닌 듯하다.

#스머프#mma#美 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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