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정은]여의도를 떠도는 낡은 ‘북풍’의 망령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7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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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합의 일부정지 놓고 野 ‘북풍’ 음모론
北 위협 고도화하는데 총선 득실 따질 땐가

이정은 논설위원
이정은 논설위원
북풍(北風)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의미는 음험하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 변수’란 개념을 넘어 특정 세력이 북한을 자극해 도발을 유도한다는 음모론적 뉘앙스가 강하다. 1997년 집권 보수당이 대선을 앞두고 안보 불안을 키워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시도했던 ‘총풍 사건’ 등의 잔상 탓이다. 진보당이 집권했을 때는 평화 공세로 표심을 끌어들인다는 이른바 ‘신(新)북풍’ 논란도 거셌다. 어느 쪽이 먼저 이용하든 총선, 대선 때만 되면 정치권에서 튀어나오곤 했던 게 바로 이 단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9·19 남북 군사합의에 대한 정부의 일부 효력정지 결정을 놓고 북풍을 언급했다. “(정부가) 북풍처럼 군사 도발을 유도하거나 충돌을 방치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우려를 전하는 형식이었지만, 9·19 합의의 효력정지 이후 발생할 북한 도발이나 남북 간 국지적 충돌은 정부가 의도한 결과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같은 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민주당의 현안질의 기류도 다르지 않았다. 기동민 의원은 “남북 정권이 티키타카 하듯이 정밀한 호흡을 맞춰서 가고 있다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거둘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가 꿀 빠는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과 윤 정부를 두고 ‘일란성 쌍생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김병주 의원은 9·19 합의의 일부 효력정지 원인이 된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대해 “1등 공신은 러시아, 2등 공신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실패”라고 했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한다면 예상되는 시기와 방식, 그에 따른 우리 군의 대응 시나리오 등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이건만 그런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때 정치권 선거 전략의 단골 메뉴였던 북풍은 더 이상 과거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 연합 방위태세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북한 관련 정보도 많아졌다. 군사적 긴장감을 지나치게 부추겼다간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최근 10여 년간의 전례들을 살펴봐도 북풍의 효과는 모호하다. 한기호 국방위원장도 지적했듯 19대 대선과 20대, 21대 총선 앞두고 북한이 미사일을 여러 차례 발사했지만 선거 결과는 모두 민주당 승리였다. 더구나 남한을 겨냥한 북한의 전술핵과 무인기, 극초음속 미사일, 군사정찰위성 개발 등은 모두 2021년 내놓은 국방발전 5개년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들이다. 우리 선거 상황을 보며 감행하는 단발적 대남 전략이 아니라는 의미다.

북한이 기다렸다는 듯 9·19 합의의 전면 파기를 선언하고 곧바로 최전방 감시초소(GP)에 중화기를 배치하며 엄포를 놓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만 놓고 내년 4월 총선에 미칠 북풍 영향을 운운하는 것은 섣부르거니와 근거도 약하다. 야당은 습관적으로 북풍 가능성을 제기해 놓고는 그 정치적 활용의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실체도 명확하지 않은 북풍을 갖고 우리 정치권만 다시 시끄러워지는 모양새다. 이는 북한이 우리 선거를 좌지우지할 카드라도 쥐고 있는 양 기고만장하게 만들 뿐이다.

러시아와의 밀착 속 기술을 바탕으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위협은 과거 판문점에서의 총격이나 연평도 포격사건 같은 국지 도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북한이 내년에는 7차 핵실험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국가정보원의 분석이다. 북풍 음모론에 빠져 우리끼리 삿대질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국가적 안보 위기 앞에서만큼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라는 게 과한 요구가 되어선 안 될 일이다.

#북풍#정치적 의미#9·19 합의 일부정지#총선 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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