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상이 그제 부산에서 4년 3개월 만에 만나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문제를 협의했지만 “3국 협력을 조속히 복원하자”는 원론적 합의 외엔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 못했다.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때면 진행되던 공동 기자회견이나 만찬도 왕 부장이 바쁘다며 회의 직후 귀국길에 오르는 바람에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공동 발표문도 없이 3국 외교부가 각자 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외교장관회의의 핵심 의제는 4년간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의 복원이었다. 한중일은 9월 서울에서 열린 고위급회의(SOM)에서 3국 정상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리창 중국 총리가 참석하는 3국 정상회의를 연내 서울에서 개최하고 이어 내년 초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내다보며 한중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번 장관회의에서 끝내 정상회의 일정을 제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최근 미국과의 관계 변화에 따른 변심(變心)일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까지 미중 갈등의 격화 속에 한미일 3국이 밀착하자 중국은 역내 협력을 빌미로 한일 양국을 미국에서 떼어 놓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갈등 국면이 누그러지면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기류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서 주변 국가 간 경쟁과 반목을 부추기는 밀고 당기기 외교를 가동한 듯하다. 중국은 이번에도 한미일 연대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경제의 정치화, 과학기술의 도구화, 무역의 안보화에 공동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분간 중국은 대미 관계에 주력하면서 한일과의 관계는 현상 관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일단 한중일 정상회의의 연내 개최는 물 건너갔고 시 주석 방한도 언제라고 기약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우리가 그런 중국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북한의 대남 위협과 북-러 군사협력 등 안보적 불안정 요인이 쌓이는 데다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처지에서 경제안보의 불확실성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마침 미중 간 해빙 기류가 형성된 만큼 우리 정부도 중국과 소통을 강화해 협력의 기반을 만들면서 외교의 폭을 넓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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