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 극작가 월레 소잉카는 세상이 몰랐으면 싶은 아프리카의 의식(儀式)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인간을 사냥해 사고팔던 시절에 있었던 의식이다. 베냉공화국의 우이다에는 ‘망각의 나무’라는 게 있었다. 노예들은 배에 태워지기 전에 나무 주변을 여러 번 돌아야 했다. 남자들은 아홉 번, 여자들은 일곱 번을 돌았다. 그들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일종의 주술적 의식이었다. 나이지리아의 바다그리에도 그와 흡사한 망각의 우물이 있었다. 물을 마시면 기억이 희석된다고 해서 ‘희석우물’이라 불렸다. 노예들은 배에 타기 전에 그 우물의 물을 마셔야 했다.
그 의식은 노예 상인들이 느꼈던 두려움의 반영이기도 했다. 노예들이 바다에서 죽거나 타향에서 죽게 되면 그들의 혼이 돌아와서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워 그러한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리 혼이라도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상인들 자신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이러니는 그러한 의식을 생각해내고 노예들에게 강요한 사람들이 외국의 침략자들이 아니라 동족이었다는 사실이다. 노예 매매는 서구인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이 공모한 범죄였다. 그래서 소잉카에 따르면,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망각의 나무를 잊는 것을 선호한다.” 망각의 우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것이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을까. 아니다. 뿌리가 뽑힌 노예들은 고향 땅을 생각하며 타향에서 트라우마의 삶을 살아야 했다. 소잉카가 세상이 몰랐으면 하면서도 망각의 나무나 우물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아프리카의 불편한 역사를 직시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이제는 외부의 침략자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그들의 범죄에 공모하고 동족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려온 내부인들을 향해서도 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처는 햇볕에 드러내지 않으면 낫지 않으니까. 이것이 어찌 아프리카만의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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