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카를 입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윽고 쥘리에트 비노슈 역의 종군기자 레베카가 나타난다. 갑자기 여성은 온몸에 폭발물을 두르기 시작한다. 그 기도는 자살 폭탄 테러범이 될 준비 의식이었다. 레베카는 이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이 테러범의 비장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레베카와 테러범은 차를 타고 카불의 혼잡한 거리까지 동행한다. 결국 폭탄은 터지고 거리에 있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거기엔 어린이들도 있었다. 취재를 이어가던 레베카도 폭발 파편에 중상을 입는다. 에리크 포페 감독의 영화 ‘천 번의 굿나잇’의 오프닝 장면이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올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국경을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사살하거나 인질로 삼았다. 안식일 오전 6시에 일어난 예고 없는 공격에 현지 기자들도 대응을 못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음 날 본보 1면에는 AP통신의 바이라인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키부츠(집단농장)에서 흰 천으로 감싼 인질을 가자지구로 납치해 가는 장면이었다. 다른 사진엔 하마스 대원들이 의식을 잃은 반나체의 여성을 전리품처럼 트럭에 싣고 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현장에는 4명의 팔레스타인 사진기자가 있었다. 이들은 별다른 제재 없이 이스라엘에서 하마스의 공격을 기록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사진기자들이 사전에 테러 계획을 알았던 게 아니냐며 의심했다. 친이스라엘 언론 감시 단체는 현장에 있던 프리랜서 기자 하산 에슬라이야가 하마스의 지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증거로 공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학살 현장을 방관한 기자들 또한 공범’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로이터통신은 자사와 계약돼 있는 2명의 기자는 사건 발생 한참 뒤 취재를 시작했다며 하마스와의 내통설을 일축했지만, AP통신과 CNN은 에슬라이야와의 계약을 즉시 끊겠다고 밝혔다. 덧붙여 AP통신은 ‘우리는 단지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뉴스 속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할 뿐’이라고 해명했다.
단지 뉴스를 수집할 뿐. AP통신 측의 해명이 틀린 말은 아니다. AP통신의 주장대로 그날 사진기자들은 평소처럼 속보에 대해 사진 취재를 했을 뿐이다. 그들은 ‘관찰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저널리즘의 오랜 원칙을 따랐다. 전쟁을 기록하는 종군기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종군기자들이 사진을 찍는 궁극적인 목적은 전쟁이란 무용하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이번 테러 사진은 다르다. 하마스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선전 선동용 사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측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마스의 테러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보복성 공습을 연일 이어갔다. 점점 하마스의 공격은 잊히고 폭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모습만 언론에 부각됐다. 여론 악화를 우려한 이스라엘군은 소수의 외신기자를 지상군과 동행 취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취재는 철저한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오히려 이스라엘군이 본인들에게 유리한 사진, 영상을 자체적으로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제공하고 언론이 받아 쓰는 일이 많아졌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내 알시파 병원 지하 터널을 보도하는 건 기자가 아닌 군복을 입은 이스라엘 대령이었다. 보도의 객관성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14일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던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의 헌병대 본부와 의사당을 점령한 뒤 촬영한 듯한 기념사진도 정확한 출처가 없어 언론사들이 사실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다.
과거 베트남전쟁 때 기자들은 제한 없이 전선을 넘나들었다. 당시 기자들은 최초로 아군의 만행을 보도해 세계적인 반전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미국 정부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언론 탓으로 돌리면서 전시 언론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국가들도 미국의 모델을 빌리면서 종군기자들이 전쟁터에 들어가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번 전쟁 현장에도 균형과 진실성을 담보해 줄 사진기자가 없다. 보도사진마저도 심리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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