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2’에서 가장 화제가 된 순간은 로봇개 ‘스팟’의 등장이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뒤를 따라 무대에 오른 노란색의 사족보행 로봇 스팟은 수많은 카메라 셔터에도 긴장한 내색 없이 임무를 마쳤다. 스팟은 그해 4월 경기 화성시의 현대차 남양연구소를 방문한 안철수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에스코트했다. 올해 4월 방한한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 역시 환영오찬 장소인 서울 신라호텔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게 스팟이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6월 11억 달러(약 1조4300억 원)를 들여 스팟을 개발한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다. 2020년 10월 정 회장 취임 후 이뤄진 가장 큰 인수합병(M&A)이다. 스팟은 등장할 때마다 화제를 불러왔지만, 정작 로보틱스 산업에서 진일보한 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각에선 “1조 원짜리 안내견”, “로봇사업 주 수입원은 유튜브”(보스턴다이내믹스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319만 명) 등의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스팟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달 싱가포르에서였다. 현대차그룹의 싱가포르글로벌혁신센터(HMGICS)는 스팟을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식 직원으로 쓴다. 스팟 2대는 각각 방처럼 생긴 작업장인 ‘셀’에서 작업자 1명을 졸졸 따라다녔다. 사람이 작업을 마치면 15장의 사진을 찍고, 곧바로 38개 부품이 제대로 조립됐는지 검사한다. 스팟이 촬영한 이미지가 PC로 옮겨져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불량을 확인한다고 했다. 정 회장이 “로보틱스는 인간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던 그대로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HMGICS의 생산혁신은 스팟만이 아니다. 각 셀에서 조립한 차체를 옮기는 건 자율주행로봇(AMR)이다. 공장 전체를 디지털로 복사한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실시간으로 찾아 수정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동차 산업을 있게 한 컨베이어벨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도록 셀 방식으로 설계했다.
현대차뿐만 아니라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온 건 생산 효율성이 뒷받침돼서였다. 1970∼1980년대는 지금의 동남아시아처럼 저렴하면서도 성실한 노동력이 비결이었다. 1990∼2000년대는 치밀한 공급망관리(SCM)가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국내 인건비는 비싸졌고 각종 노동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SCM은 개별 기업 경쟁력보다 ‘나라의 힘’이 더 중요해졌다. 글로벌 제조업 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바이 코리아’의 매력은 점차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스팟을 제대로 쓰고 있는 HMGICS 출현이 반가운 이유다. 현대차는 HMGICS를 생산혁신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한다고 했다. 여기서 성공하면 국내외 신규 공장들에 적극 도입하겠다는 거다.
컨베이어벨트로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을 집어삼켰던 포드의 성공 스토리를, 한국 기업이 다시 쓰지 말란 법은 없다. 스팟이 그 ‘혁명’의 상징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