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 명장’ 김유신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꼴 베고 가축 기르는 아이들도 그를 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까지 이어지던 김유신의 명성도 무심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차츰 희미해져 갔다. 그런 연유로 그가 어디서 살았고 또 어디에 묻혔는지를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국가 사적 ‘김유신 묘’가 실제 그의 무덤인지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집의 경우 근래 발굴을 통해 위치와 규모가 밝혀졌다. 그의 집터 발굴에서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무엇일까.
‘물맛 좋은’ 재매정은 어디에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 왕도에 17만8936호(戶)가 살았고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금입택이란 글자 그대로 금으로 장식된 집이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을 말하는 것 같다.
열거된 금입택 가운데 재매정택(財買井宅)은 재매정이라는 우물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은 그것에 작은 글씨로 ‘김유신의 종갓집’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1976년, 정부는 김유신의 집이 월성 서쪽에 위치한다는 기록, 그리고 조선 고종 9년(1872년) 경주부윤 이만운이 세운 ‘신라 태대각간 개국공 김선생 유허비’ 등에 근거하여 유허비 곁 우물을 포함한 그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했다. 특히 사적 명칭을 재매정택이 아닌 재매정으로 결정한 것은 김유신 집 우물이 가지는 강력한 이미지 때문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집 우물에 대한 설명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왕도로 막 돌아왔을 때 백제군이 재차 침입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에 들르지 않고 그대로 출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 오기를 기다렸지만, 문을 지나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은 아직 옛 맛 그대로구나!”라고 말하곤 곧바로 전장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재매정택의 재매정이 바로 그 우물일 가능성이 높은데, ‘재매’는 재매부인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그녀를 김유신이 만년에 정략 결혼한 무열왕의 딸, 지소로 보는 견해가 대세인데, 근래 김유신의 전처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우물 터에서 쏟아진 유물들
1991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재매정의 성격 해명을 위한 발굴에 나섰다. 3년간 이어진 발굴에서 우물과 함께 그 주변 사방 70m 범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재매정으로 전해지는 우물은 상부가 근대에 정비된 것이지만 아래쪽은 통일신라 때 쓰였음이 확실하다는 점, 그리고 주변에 여러 동의 건물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기대했던 금입택의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조사단은 재매정의 위치에 착오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 때문인지 이후 20년 동안 재매정은 학자들의 관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13년 발굴이 재개됐다. 구역을 확장해 조사하면 새로운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년에 걸친 발굴에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새로운 자료를 다수 확보했다. 그곳에는 수십 동의 건물터와 신라 때 우물 터 4기가 더 있었고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면적은 3000평에 달했다.
특히 우물 터 안에서 중요 유물이 쏟아졌다. 나무 두레박, 뼈로 만든 골무,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 기와와 전돌, 토기가 다수 출토된 것이다. 구덩이 하나에는 비늘갑옷(찰갑·札甲) 일부가 폐기되어 있었는데, 개별 부품의 숫자가 696매나 됐다. 일각에서는 이 갑옷을 김유신과 관련짓고 있지만 함께 폐기된 유물 가운데 9세기 것이 많아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이 발굴을 통해 조사단은 이 유적을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재매정택이라고 특정했다.
제물이 된 말 머리뼈의 증언
발굴은 재매정택 북쪽으로 확대되었고 그곳에서 정연하게 구획된 공간에 배치된 여러 채의 가옥 터를 찾아냈다. 가옥마다 복수의 건물과 부속시설을 갖춘 모습이었다. 그 북쪽에는 5∼6세기 대형 무덤이 분포되어 있으므로 이곳에 존재한 일군의 가옥들은 신라 왕경 내 여타 가옥들과는 분리되는 듯한 입지를 지녔으며, 궁궐의 서문이나 재매정택과 인접해 있어 요즘 표현으로 ‘금싸라기 땅’에 해당한다. 그러한 입지와 역사 기록, 그리고 발굴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면 아래쪽이 김유신 종택, 위쪽이 김유신 일가의 거주 구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가운데 2호 우물 터에서는 특이한 자료가 검출됐다. 우물 바닥에 4개체분의 말 머리뼈가 발견된 것이다. 신라 우물 터에서는 신라 멸망기에 우물을 폐쇄하면서 제물을 바친 흔적이 종종 발굴되곤 하는데, 이처럼 말 네 마리의 머리를 잘라 제물로 바친 사례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신라인들은 우물 속에 용왕이 산다고 여겼기에 말을 죽여 제사를 지낸 다음 우물을 폐기한 것인데, 당시 말의 가치와 효용성을 생각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재매정택은 언제쯤 만들어져 언제까지 존속했을까. 발굴된 유물에 그 단서가 숨겨져 있다. 이 유적에서는 신라에서 기와가 처음 만들어지던 6세기 전반대 기와가 출토됐다. 그 시기에 기와는 궁궐이나 사찰에 한정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재매정택에 거주한 인물의 신분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장차 연구가 필요하지만 532년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 신라 왕도로 옮겨와 이곳에 터를 잡았고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을 거치면서 차츰 재매정택의 외형이 갖추어졌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우물의 폐기 양상으로 보면 신라 멸망기에 규모가 급격히 축소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 전기의 유물이 일부 확인되므로 그 무렵까지 일부 건물이 존속된 것 같다. 장차의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져 재매정택과 그 주변의 유적이 품고 있는 신라사의 다양한 수수께끼가 차례로 풀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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