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 새 바람 ‘아트앤드테크’
기술융합예술 통한 작품 활동… 시공간 제약 없고 관람객 참여 유도
MZ세대 창작자-대중에게 인기… 예술 입힌 ‘가전’ 등 상품화도 유리
창작자 “평면 한계 벗어나 자유로워”… AI 예술 분야 등 정부 지원책 늘어
《지난달 25일 도심 속 주말 인파를 뚫고 도착한 서울 종로구 아트코리아랩 전시장. 관람객들로 붐비는 이곳에 마치 고요한 낙원 같은 공간이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머리에 가상현실(VR) 기기를 쓰니 보랏빛 우주와 거목 한 그루가 눈앞에 펼쳐졌다. 평소 아무리 애써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잡념이 잔잔한 음악과 우주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메타버스 기술을 활용한 몰입형 예술명상 플랫폼 ‘고요행성’이다. 무용을 전공한 박수진 스페이스몸 대표와 김서령 프로듀서가 만든 것으로 메타버스 공간에 모여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다. 7년 전부터 명상 공연과 프로그램을 제작해 온 이들이 메타버스 플랫폼을 활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표는 “오프라인 명상과 달리 시공간 제약이 없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 해외에 선보이기도 수월하다”며 “훈련이 필요한 일반 명상에 비해 초보자들도 손쉽게 몰입 가능한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 메타버스 명상부터 ‘관객 마음 읽어낸 커피’까지
최근 예술계에 ‘테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예술가들이 직접 최신 기술을 배우거나 기술자들과 협업해 기술융합예술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것. 올해 10월 개관한 예술특화 종합지원 플랫폼인 아트코리아랩에선 지난달 23∼25일 전시와 공연, 강연을 결합한 행사 ‘랩들이’가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아트코리아랩이 올해 예술가, 연구소, 대학교, 기업 등을 대상으로 추진한 지원사업에 참여한 총 55개 팀의 작품 38건을 소개하고 실험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공학도가 자신의 역량을 살려 예술 활동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았다. 세 명의 공학도로 이뤄진 미디어아트랩 ‘얼스’는 관람객의 감정을 데이터로 분석해 이를 맛으로 표현해내는 ‘탠저블 이모션 리플렉션’을 개발했다. 손바닥 땀 분비량으로 감정을 측정하고, 2차원 좌표평면으로 표시한 뒤 단맛, 쓴맛, 신맛 등 원두를 배합해 관람객에게 맞춤형 커피를 제조해 준다. 이승정 얼스 대표는 “HCI(인간과 컴퓨터 상호작용관계)를 연구하던 중 ‘우리는 얼마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살까’를 고민하다 작업이 시작됐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선 이달 13일까지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 언폴드엑스’가 열린다. VR 기술을 활용한 몰입형 콘텐츠와 인공지능(AI)을 오디오에 접목한 청각예술, 관객과 상호작용 하는 인터랙티브 아트 등 국내외 작품 23점이 전시된다. 서울문화재단의 이정훈 융합예술팀장은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예술을 창작, 유통, 소비하는 젊은 예술가와 대중이 늘면서 기술은 자연스럽게 물감이자 악기가 됐다”며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기존 전시 위주였던 행사를 지난해부터 축제 형태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 접근성 높이며 작품에 생명력 불어넣는 ‘기술’
창작자들은 기술을 통해 관람객 접점을 늘리는 보람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각각 조소와 클래식음악 작곡을 전공한 권정원, 소수정 작가는 더 다양한 관람객을 만나고자 기술융합예술에 도전했다. 올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역사 내에 전시된 작품 ‘닿을 때 만나는 것들’은 시민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센서로 인식해 무작위적 이미지와 소리로 변환하고, 이를 벽면에 투사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다. 권 작가는 “작품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관람객이 찾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술 기반 작품은 언제 어디서든 전시하기 좋고, 한 번에 여러 감각을 활용할 수 있어 장애인, 어린이 등의 참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술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도 제시한다. 그림책 등 기존 평면 일러스트 작업을 하던 이은정 작가(문요)는 올해 처음 VR 드로잉 툴을 익혀 메타버스 그림책 콘텐츠를 제작했다.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토대로 만든 알록달록한 가상 도시를 이용자가 탐험하는 콘텐츠다. 이 작가는 “VR 드로잉 툴로 3차원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평면의 한계를 벗어난, 그림의 새로운 가능성을 체감했다”며 “향후 상호작용이 가능한 어린이용 VR 교구 등도 개발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수령 아트코리아랩 본부장은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 있는 젊은 창작자들 중심으로 기술융합예술 교육, 네트워킹 등에 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기술은 ‘배고픈 예술가’가 소득을 올릴 발판이 돼 주기도 한다. 기술을 접목한 예술품은 상품화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자성유체(자석의 성질을 가진 액체)를 활용한 음향시각화 장치(FAV)가 대표적 사례다. 상품화를 의도하진 않았으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베놈 스피커’란 별칭으로 유명세를 타며 미국 인디고 크라우드펀딩에서 1억 원 넘는 모금을 이뤘다. 이를 개발한 정승훈 번슬랩 대표는 “과거 일러스트 프리랜서로 활동할 때와 비교해 수입이 안정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디스트릭트(d’strict)의 실감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이 있다. 프로젝션 매핑(영상을 투사해 대상물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기술), 3D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 등을 활용해 8m 높이 미디어 폭포, 거대한 밤바다 등을 전시한다. 2020년 제주에 처음 설립된 이후 SNS 인증샷 명소로 입소문을 타며 강원 강릉, 전남 여수, 부산(예정)으로 확대됐다. 웹디자이너 3명이 외주용역으로 시작한 회사가 600만 명의 관람객(누적 관람객 수)을 끌어모은 ‘미디어아트’ 기업으로 거듭났다.
● 기술융합예술, ‘기계’인가 ‘작품’인가
그런데 기술의 비중이 높고 외관과 특성이 ‘기계’에 가까워도 ‘예술품’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광석 서울과기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작곡이나 건축 등은 인간의 기술을 활용해 구현한 예술이다. 인간의 기술이 그 자체로서 오래전부터 예술로 대접받았던 것”이라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가들은 기술과 예술을 한 몸으로 여긴 ‘테크네’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기술을 창작의 재료나 매체로 쓰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과 기계가 구축할 미래를 보여준다면 예술로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술융합예술은 예술 생태계를 다양화하고 첨단기술 시대에 대한 비판점을 제시한다는 의의도 있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과거 사진, 비디오, 인터넷 등이 등장했을 때처럼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예술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며 “이미 일상 깊숙이 침투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기술의 잠재적 위험과 비예측성 등을 보여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융합예술이 화두가 되며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책도 최근 빠르게 확대됐다. 창작 지원은 물론 예술가와 기술자 간 교류, 작품 유통과 판매, 경영 자문까지 돕는 것. 그러나 지원이 최신 유행 기술에 집중되고 장기적 방향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창작자는 “특정 기술이 유행하면 지자체 예산이 그 기술로만 쏠린다. 한때 실감 미디어아트가 그랬고, 메타버스로 옮겨갔다가 이젠 AI에 집중되고 있다. 창작자는 불안하고 대중은 금방 피로를 느낀다”고 했다.
기술융합예술이 비교적 일찍 확산한 해외에선 기술 혁신과 예술 진흥, 사회문제 해결을 아우르는 관점에서 정책이 설계된다. 유럽연합(EU)이 2021년부터 2027년까지 955억 유로(약 135조 원)를 투입해 기술혁신과 사회문제 해결을 결부하는 지원책인 ‘호라이즌 유럽’의 과학, 기술, 예술 융합 플랫폼 ‘S+T+ARTS’가 대표적이다. 이광석 교수는 “기후 위기 등의 문제를 과학자와 예술가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S+T+ARTS 등은 ‘사회문화적 디지털 전환’이란 뚜렷한 방향성을 갖지만 국내 지원책은 K컬처, 신성장산업 등의 영향을 받아 단기적, 양적 지표에 휘둘리는 경향이 크다”며 “단순 외형 성장이 아닌, ‘기술 동반 사회’라는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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