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휘자? 먼저 상상력을 펼치고, 그 상상한 바를 오케스트라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게 전부다.”
1997년, 지휘자 죄르지(게오르그) 솔티의 런던 자택을 찾아서 좋은 지휘자의 덕목을 물었다. 그가 말한 답은 놀랄 정도로 명료해 몰래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말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은 21세기 들어서였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지낸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는 지난 시대의 토스카니니나 푸르트벵글러, 카라얀이나 솔티와 대비되는 ‘민주주의적’ 지휘자 상을 선보였다. 단원들의 의견을 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빚어져 나오는 소리를 연주에 반영했다.
‘마에스트로의 리허설’(톰 서비스 지음·아트북스)이라는 책에서 한 플루트 연주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바도는 음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에 서서 벌어지는 일을 조율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죠.”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21세기 들어 마리스 얀손스, 리카르도 샤이, 피셰르 이반 등 여러 지휘자가 ‘단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게 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연주에 반영하는’ 민주적 지휘자상을 선보였다.
10월 3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클라우스 메켈레 지휘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의 프로그램북에서 그간 어렴풋이 생각해오던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글을 발견했다. 지휘자 백승현(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 수석지휘자)은 예전의 ‘권력형 마에스트로’를 대신하는 젊은 지휘자 세대의 대표 사례 중 한 사람으로 올해 27세의 메켈레를 꼽았다.
백 지휘자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달라진 관계 변화의 출발점을 ‘음악 교수법과 네트워크의 발달’에서 찾았다. 예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음악적 직관을 갖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들이 자신의 설계를 주입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음악을 논의할 수 있는 조력자로 충분할 것이다. 백 지휘자는 첼리스트로 출발한 메켈레의 음악이 철저하게 ‘연주자적 시점’에서 출발한다며 ‘그의 지시와 독려에서는 거절당하거나 생략되는 음악적 요소가 없다’고 설명했다.
행운이랄까. 10월에서 12월 초까지 9개나 되는 유럽 명문 교향악단의 내한 공연 대부분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개성 강한 여러 지휘자의 손끝에서 뿜어져나오는 음악은 새삼 이들의 개성을 리더십적 측면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었다. 메켈레 지휘 오슬로 필하모닉이 연주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연주에서는 파이프오르간처럼 투명하게 단일체로 뿜어져나오는 아름다운 음향의 밸런스가 일품이었다. ‘서로 듣게 만드는’ 과정이 이루어낸 명품 사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대비된 경험 중 하나가 11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키릴 페트렌코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였다. 메인곡은 베를린필 옛 수석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장기곡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였다. 현 베를린필의 수석지휘자인 페트렌코는 미세한 부분까지 단원들을 장악하고 통제했다. 카라얀 시절의 과열된 현과 금관의 음색은 어지간히 21세기적으로 중화됐다. 그런데 각자 솔리스트로도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현악 연주자들의 합주는 그다지 쾌적하게 들리지 않았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과장된 대비는 피하고 싶다. 자신의 해석을 강력하게 관철하는 지휘자도 단원 각자의 예술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지휘자가 될 수 있다.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다. 각각의 지휘자가 강조하는 초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해외 오케스트라 내한 러시가 끝을 바라볼 무렵인 11월 말, 내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에 취임하는 야프 판즈베던이 지휘한 서울시향 공연 두 개가 오케스트라 음악 팬들의 화제에 올랐다. 각각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메인곡으로 선보인 두 콘서트에서 판즈베던과 서울시향은 쾌속으로 질주하는 뜨거운 힘과 밀도 높은 합주력으로 갈채를 받았다. 판즈베던은 자신이 맡은 악단들을 치열하게 조련하기로 이름 높은 지휘자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악장 출신인 그는 단원들의 자발성과 ‘서로 듣기’가 주는 힘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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