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클라바(바라클라바)’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을까? 낯선 명칭일 수 있지만 생긴 걸 보면 대부분 아는 제품일 거다. 영화에서 테러범이나 도둑이 니트로 된 얼굴 마스크를 뒤집어쓰는 걸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게 발라클라바다. 눈과 입만 뚫려 있거나, 얼굴 전체가 뚫려 있거나, 시야만 겨우 확보하고 얼굴 전체를 막는 등 다양한 변형이 있는데 어떤 식이든 휴대하기 편하고 뒤집어쓰면 머리와 목뒤까지 한 번에 감싼다.
발라클라바는 크림반도 남쪽 세바스토폴 근처 지역 이름이다. 지금도 전쟁터인 이곳에서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대영제국 등이 결성한 동맹군 사이에 크림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발라클라바 전투에 참전한 영국 군인들은 적의 감시를 피하고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뜨개질로 만든 얼굴 마스크를 사용했다. 전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추운 날이 되면 전쟁터에서 썼던 마스크를 계속 썼다는데, 이것이 알려진 유래다.
패션계에서 발라클라바는 두 가지 특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얼굴을 가리는 데서 오는 익명성, 그리고 보온과 같은 실용성이다. 1990년대에 마르지엘라나 알렉산더 매퀸 같은 디자이너는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감싸거나 금속이나 보석으로 뒤덮은 발라클라바를 페티시 패션, 정체성과 왜곡 같은 주제에 접근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드릴 같은 힙합과 폭력이 결합된 장르에서 신원 노출을 막기 위해 발라클라바를 활용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부각되는 측면은 보온과 같은 실용적인 면이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다지 시크하고 멋진 이미지를 가진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패셔너블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아이템을 남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사용하는 의외성과 유니크함이 최근 패션의 트렌드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면서 얼굴을 감추는 데서 오는 편안함에 익숙해진 경험이 발라클라바로 연장되고 있기도 하다.
관심과 수요가 커지면서 공급도 늘어났다. 많은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색감도 다양해졌고, 니트 외에도 고어텍스나 라텍스, 다운 등을 이용한 여러 변형도 등장했다. 미우미우, 자크뮈스, 발렌시아가, 로에베 등 유수의 브랜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익명성과 기능성을 섞으며 발라클라바를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다.
하지만 발라클라바는 지금 세계의 모순과 균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백인과 흑인이 발라클라바를 착용했을 때 사람들의 전혀 다른 대응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발라클라바는 분쟁과 테러, 혐오 범죄 현장에서도 사용된다.
이렇듯 다양한 사회 정치적 층위를 가지고 있지만 유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건조하고 찬 바람이 부는 우리 날씨에 아주 잘 맞는다. 이런 확실한 장점은 발라클라바를 오랜 시간 살아남게 했고 새로운 운명을 만나게 했다. 앞으로 패션계가 또 어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낼지 궁금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