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한 도적[이준식의 한시 한 수]〈241〉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7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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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부슬부슬 비 내리는 강마을,
이 밤 녹림호객(綠林豪客)이 내 이름 듣고 알은체한다.
다른 때라도 내 이름은 숨길 필요 없겠네.
지금은 세상 절반이 다 그대 같은 도적이려니.
(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

―‘정란사 마을에서 묵다 만난 밤손님(정란사숙우야객·井欄砂宿遇夜客)’ 이섭(李涉·당 중엽)









야밤에 일단의 사내들이 시인이 탄 배를 에워싼다. 녹림호객, 뜻인즉 푸른 숲속에 근거지를 튼 영웅인데 이름은 그럴싸해도 실은 도적떼를 일컫는 말이다. 그 수령이 글깨나 읽었던지 재물 약탈하러 나타났다가 시인의 이름을 듣더니 당신의 시명(詩名)을 익히 들었으니 재물은 필요 없고 시나 한 수 지어 달라고 했다. 시인은 즉석에서 이 시를 써주었고 도적은 보답으로 음식까지 푸짐하게 선사했다고 한다. 도적이라고 시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잠시 직업적 본분(?)을 망각한 아이러니를 부각한 시인의 발상이 재미롭다. 시제에는 ‘밤손님’이란 통상적인 표현을 그대로 쓰면서도 시에서는 ‘녹림호객’이란 미칭(美稱)을 부여하였으니 시인의 순발력 있는 ‘예우’에 도적도 탄복해 마지않았을 터.

‘전당시(全唐詩)’와 여러 야사에 전해지는 이 일화를 내세우며 중국인들은 도적조차 시를 애호할 만큼 당대에는 시가 보편화되었노라 자부한다. 정작 시인 자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세상 절반이 지금은 다 그대 같은 도둑’이라며 암울한 사회 현실을 개탄한다. 혹여 다른 시기, 다른 곳에서 또 도둑을 만날지언정 굳이 이름을 숨길 필요 없다는 자조(自嘲)를 통해 시인은 저들과 동료의식이라도 공유하자며 웃픈 냉소를 보내고 있다. 글깨나 읽었다는 자가 어쩌다 도적질에 가담하게 되었는가라는 핀잔 너머 주류 사회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했다는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사랑#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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