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릴 때마다 떠오릅니다. 보온도시락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자 보였던 시퍼런 새벽하늘. 근심을 삼킨 채 “잘 다녀와” 손 흔들던 부모님. 버스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영어 단어장을 최후까지 곱씹던 시간. 이해찬 세대, 최악의 불수능. 2001년 11월 7일, 21세기 첫 수능을 치른 우리 2002학번을 규정한 말들이었습니다.
그때 수능을 마친 교실은 볼만했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집을 당당하게 푸는 친구도 있었지요. 하교하면 게임방으로 몰려가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에 접속했습니다. 그래도 수능 전의 일상을 크게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세상을 끝낼 듯 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닥치니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2024학년도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이 어제 8일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정부는 한사코 ‘킬러(killer) 문항’이 없었다는데 사상자는 즐비합니다. 오징어 게임 최후 관문 같았던 수학 22번에서는 응시생 99%가 좌절했습니다. 전국 유일한 만점자는 정부가 ‘사교육 카르텔’이라며 세무조사와 압수수색을 벌인 바로 그 강남 대형 학원에서 나왔습니다. 이쯤이면 사교육의 필요성을 정부가 수능으로 증명해준 셈입니다.
어찌 됐든 시험은 끝났습니다. 수능을 본 친구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온라인 커뮤니티를 살펴봤습니다. “어제는 배추전 여섯 장, 오늘은 배추 볶음에 가까운 떡볶이, 저녁은 배추 된장국이래요.” 김장철이죠. 공부하느라 소화 불량에 시달렸을 텐데 배추는 식이섬유가 풍부하답니다. “그냥 내 실력이 처참했다”, “약을 먹어도 먹어도 속이 답답함.” 12년 마라톤 결승점을 통과했는데 자책이 앞섭니다. “학벌을 따기 위해 재수한 이유. (나를) 구차한 말 없이 한 단어로 증명할 수 있어서. 그것 말고는 없다.” 대학명이, 좀 지나면 직장명이, 연봉이, 보유한 아파트 이름이 나를 규정하는 세상을 우리는 대물림하고 있네요.
마음 쓰이는 글이 있었습니다. “매몰 비용이 너무 아쉬움. ㄹㅇ(레알·‘정말(real)’).” 매몰 비용은 이미 지출해서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말합니다. 매몰 비용의 오류라는 말도 있는데,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시간, 노력, 돈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잠을 줄여가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12년이 시험 점수 낮다고 매몰 취급당한다면 얼마나 허탈할까요.
그래도 말입니다. 지금은 소진한 시간이 매몰 비용 같지만 훗날 돌아보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2점짜리 문제를 풀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붉은 소낙비로 점철된 시험지를 물러서지 않고 마주하면서, 그대들은 단단해졌을 겁니다. 그것은 매몰이 아니라 퇴적입니다. 좌절과 실패, 노력한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인고(忍苦)의 지층을 구축하고 있을 겁니다. 언젠가 당신의 삶이 흔들릴 때, 누가 뭐래도 단단하게 붙잡아줄 화강암층.
끝으로 좋아하는 글을 빌려 위로와 응원을 전합니다. 수험생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뜨겁게 지져봐라/나는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 거세게 때려봐라/나는 단단한 돌덩이, 깊은 어둠에 가둬봐라/나는 홀로 빛나는 돌덩이, 부서지고 재가 되고 썩어버리는 섭리마저 거부하리/살아남는 나, 나는 다이아.’(웹툰 ‘이태원 클라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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