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 양[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7〉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8일 23시 45분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로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이현승(1973∼)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로 끝나는 시조의 한 구절이다. 이조년의 이 시조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심란한 마음, 혹은 임금이 걱정되어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풀이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때의 다정이란 단 한 사람의 몫이다. 이런 다정은 홀로의 마음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질 것이다.

이런 옛날의 다정과 오늘날의 다정은 많이 다르다. 옛날의 다정이 개인의 다정이었다면 오늘의 다정은 우리들의 다정이다. 아픈 손이 아픈 손을 알아보듯이, 이 시에서처럼 왼손의 상처가 오른손을 일깨우듯이 우리의 다정은 한 사람 안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이것은 나에게서 나와 너를 일으키고, 너에게서 비롯해 나를 안아주는 상호적 희망이다.

돈이 좋아서 인간은 점점 천박해진다. 명예, 존엄, 품위처럼 멋진 가치들도 돈 앞에서는 힘을 잃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큰 명예는 못 지켜도 서로에게 다정할 수는 있지 않을까. 존귀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다정할 수는 있지 않을까. 다정은 최소한의 가치다. 이현승 시인의 시는 이제 개인이 아니라 우리들의 명제가 되어버린 다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 우리는 한 줌의 다정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다정이 더욱 절실한 계절이다.

#다정도 병인 양#심란한 마음#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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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추천 많은 댓글

  • 2023-12-10 13:39:04

    그리고 제발 의미 부여는 인간이 해서 인공지능하고 비교할 수 없는데, 탐욕과 침체를 유지하기 위해 쇼를 하는 어리석은 자를 도와줘야지 따라가지 말자!

  • 2023-12-10 13:37:45

    나민애 씨도 참... 댓글을 안 쓸까 했는데, 사회 문제 근원인 돈(물건)보다 인간이 가치가 낮은 환경에 너무 잘 적응해서 안타깝기에 씁니다. 돈(물건)을 좋아할 수 있어요. 단지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국가가 없기에 문제죠. 자본주의는 다루는 수단입니다. 다루지 못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 낮은 사회 문제는 반복합니다. 우리 모두 청동기시대 유전을 극복하자! 시민권 가치를 높여서 사회 문제 근원을 해결하자! 그리고 우리 같이 성숙하자! 세계가 자본주의를 다룰 줄 모를 때 우리는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자!

  • 2023-12-09 12:46:45

    1973년이면 저때도 병원에서 병원비 못내서 야밤도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보면 격세지감이다.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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