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평상시 한국인들은 한국을 의식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한국인은 그저 인간이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다르다. 그저 인간이기를 그치고 새삼 한국인이 된다. 음식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 한국인은 그저 음식을 먹는다. 백반을 먹을 때조차 우리는 음식을 먹는 것이지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다르다. 똑같은 음식도 이제 ‘백반’이기를 그치고 ‘한식’이 된다. “백반 먹으러 갈까”가 아니라 “한식 먹으러 갈까”라고 말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을 벗어났을 때, 한국을 보다 첨예하게 의식하게 된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물을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사진인들 다르랴. 한국인이 한국에서 풍경과 일상과 순간을 찍을 때 그것은 그저 풍경이고, 일상이고, 삶이다. 그러나 외국인은 다르다. 그들에게 그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풍경이 아니라 한국의 풍경이고, 그저 일상이 아니라 한국의 일상이고, 그저 삶이 아니라 한국의 삶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삶을 찍은 사진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장에 갈 때,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삶을 찍은 사진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간다.
외국에서 열리는 한국 주제의 전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관객들은 그저 예술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특정 나라의 예술을 보러 온다. 케이팝 열풍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한국 관련 전시가 미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샌디에이고미술관(SDMA)에서는 ‘생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샌디에이고미술관 역사상 최초의 한국 미술 주제 기획전이 열리고,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는 한국 실험 미술전이 열리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는 한국실 설치 25주년을 기념하는 ‘계보: 메트의 한국 미술’전이 열리고,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는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 미술전’이 열리고, 애리조나주의 투손 크리에이티브 사진센터(CCP)에서는 ‘기록과 경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현대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외국에서 열리는 이런 한국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한국의 존재감을 각인하기 위해 어떤 전형성을 내세우기 쉽다. 예컨대, 1994년에 투손의 피마대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사진전을 떠올려 보자. 전시 제목은 그 이름도 친숙한 ‘Visions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비전)’이었다. 그 전시에는 예상대로 갓을 쓴 양반의 모습이나 한복 차림의 부녀자 모습이나 한국의 산야 곳곳에서 자라는 소나무 사진이 포함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인들은 아직 낯선 나라인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서 전시장을 찾았을 것이고, 전시 기획자는 그에 부응하기 위해 전형적인 이미지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라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이미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를테면 케이팝 스타들처럼 한국인들은 잘생기고, 춤을 잘 추는 매력적인 사람들일 거라는 전형적인 기대도 있다. 그러나 기대는 충족되기보다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케이팝 매력에 흠뻑 빠져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남겼다는 일화가 잊히지 않는다. 평범한 한국인을 마주한 그 관광객은 의아해하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케이팝 스타들과 다른 부족 출신입니까?” 하긴. 나나 내 주변 사람 중에 케이팝 스타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은 이제 다른 부족들이 모여 사는 나라처럼 다른 외모, 다른 가치관,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부글거리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한국 관련 전시는 30년 전과는 달라야 한다. 전형성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그 기대를 창조적으로 배반해야 한다. 관객들의 한국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넘어서야 한다. 예술의 야심은 얼핏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층위(layer)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던가. 이번에 열린 CCP의 한국 현대 사진전의 경우를 보자. 전시장을 찾은 미국인들은 케이팝 스타 사진이나 옛 궁궐의 사진이나 조선의 달항아리 사진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는 충족되기보다는 멋지게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상외의 이미지들을 마주치게 된다. 추석 귀성 행렬에서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 심야에 마주친 귀를 다친 소년, ‘국제결혼’을 하고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커플, 고즈넉한 옛 궁궐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급조된 한옥 수영장,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한 청소년들, 심지어는 서울 시민들이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북한산 들개 사진도 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해 적지 않은 개들이 주인을 잃고 근교의 산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들은 컴퓨터를 통해 조작된 가상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한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대상들을 찍은 현장 사진들이다. 현장 사진가의 소명은 대상을 핍진하게 보여주면서 그 대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한국 관련 전시도 마찬가지다. 한국 관련 전시의 소명은 눈앞의 한국을 보여주되 전형적인 한국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애증의 나라, 한국의 현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나 ‘케이팝의 나라’와 같은 상투어로 요약될 수 없을 만큼 뒤틀려 있으니까. 그래서 흥미롭기도 하고, 그래서 중독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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